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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풍 Dec 30. 2024

매듭 달

자신을 돌아보는 템플스테이

한 해가 저물어간다. 돌아보면 무엇을 하며 1년이 지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평정심을 갖고 가는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영혼의 안식처인 신륵사 템플스테이를 찾았다. 프로그램 없이 나 홀로 1박 2일 쉼을 갖기로 했다. 남한강을 마주한 신륵사는 예전에도 오늘도 천년의 고요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극락보전을 지나 언덕 위의 다층 전탑 앞에선다. 강 건너 멀리까지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탑돌이를 한다. 지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는다. 한 해 동안 이런저런 일로 마음에 얹힌 무거운 짐이 서서히 내려앉는 기분이다.     


새벽 4시, 매서운 강추위 속에서도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났다. 오랜만에 보는 청량한 새벽하늘 어린 왕자와 인사를 나누며 너의 별나라에는 별일이 없기를 안부를 전한다. 남한강 위로 피어오른 새벽안개는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흩날리는 연기처럼 내 마음속의 상실감을 허공에 날려 보낸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또렷한 적막을 들이마시며 마음속 어지러움을 정리한다.     


서장대에서 맞이했던 지난 1월 1일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기억난다. 태양의 붉은빛은 흰 눈처럼 맑고 순수했던 다짐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 빛 아래 코로나 팬데믹 종료라는 희망의 씨앗을 품었었다. 다행히 5월 1일부로 코로나19 종료를 발표하여 마스크를 벗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었다.     


우리 일상은 언제나 그렇다. 씨앗은 봄이 오기 전의 혹독한 꽃샘추위를 견뎌야만 싹을 틔울 수 있다. 1월 첫날의 다짐과 약속들은 봄바람에 흩어졌고,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졌지만, 꽃잎이 떨어질 때 남겨지는 향기처럼, 흘러간 시간은 나름의 의미를 새기고 있다.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딸과 함께 보낸 한강 변의 밤, 워커힐에서 바라본 야경은 별빛처럼 마음 깊은 곳을 환히 비췄다. 그 순간만큼은 삶의 고단함도 녹아내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무성히 자란 나무들은 흐르는 땀방울을 닮았다. 아무리 고되더라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정원의 나뭇잎들은 색을 갈아입었다. 노란 국화는 지나간 시간의 추억을 불러왔고, 억새의 흔들림은 내 마음속의 미련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꽃보다 고운 단풍은 여행을 부추기며 찰나의 아름다움을 과감히 드러냈다. 그러나 가을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겨울은 시절의 끝처럼 보인다.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고, 흰 눈은 대지를 덮어 모든 것을 감춘다. 그러나 겨울은 끝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이다. 신륵사 은행나무는 앙상한 몸으로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있다. 빈 가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새싹을 품고 있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본다. 마치 얼어붙은 강, 그 아래에서 물이 쉼 없이 흐르는 것처럼, 침묵 속에도 생명은 숨 쉬고 있다.      


지금 나는, 지나간 시간을 되새긴다. 이루지 못한 다짐들과 흩어진 약속들은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도 삶의 의미는 쉼 없이 흘렀다. 600년을 묵묵히 지켜온 신륵사 은행나무처럼, 나 역시 삶의 무게를 담담히 견디며 새로움을 준비할 것이다.     


혼란스러운 시국과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이 세상을 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삶의 무게를 견디며 끝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고목처럼,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버티고 엮어나갈 것이다. 올해의 끝자락 반짝이는 남한강의 윤슬을 바라본다. 2025년 새해에는 지구촌의 전쟁이 멈추고 안전한 사회,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한다. 항공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와 애도를 전합니다.

        

신륵사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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