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장면을 감정으로 표현하기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던 아침, 문이 조용히 밀리며 그가 들어섰다. 감색 양복에 하늘빛 줄무늬 넥타이,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말끔하게 금테안경을 쓴 신입사원이다.
그 순간, 이유도 모르게 목 뒤가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의 이름이… K?
오래전 좋아했던 이름 하나가 스르르 떠오르며 잊고 지낸 기억이 찬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소리 없이 펄럭거린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 5분 전에 도착하면서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업무 앞에서는 책임감 있고 정확했다.
그는 과묵하고, 성실한 업무태도로 회사원의 표본 같았다.
사무실이라는 거대한 행성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같은 궤도를 도는 작은 별처럼 가까워졌다.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요일 특근하는데… 같이 나와줄 수 있어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1시에 소개팅이 있어서요.”
소개팅…? 왜 난 이 말에 잠이 안 오지? 밤새 천장을 노려보다가 결국 이불을 걷어찼다.
일요일 오전, 느긋한 아침잠을 포기하고 뛰어나오듯 집을 나섰다. 한산한 거리엔 귤빛 조명을 달고 서 있는 붕어빵 손수레가 서 있었다. 따끈한 붕어빵 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손이 마음을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왜 이러지?’
조용한 사무실 문을 열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왔어요?”
그 말 한마디가 가슴을 빠르게 두드렸다.
심박수가 갑자기 뛰어올랐다.
메마른 행운목에 물을 주며 “괜찮아, 진정해…”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는 뜨거운 붕어빵을 호호 불며 나눠 먹었다.
나는 꼬리부터, 그는 머리부터 성큼 먹는다.
그 작은 차이를 관찰하는 내 눈이 스스로 낯설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
내가 사람을 이렇게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나?
잠시 후 그는 소개팅을 갔다가 한 시간도 안 돼 돌아왔다.
표정은 종이컵 속 식은 커피처럼 미지근했고, 목소리는 조용했다.
“같이 나갈래요?”
그 말에 숨도 쉬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명동의 공기는 흔들리는 불빛과 사람들의 열기로 반짝였다.
우리는 네온사인 아래 천천히 걸었고, 다리가 아프면 음악다방에 잠시 들어가 칵테일 한잔을 나눴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마음은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날의 명동은 오래된 LP가 새로운 노래를 재생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듣고 있었다.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옷을 고르며,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서성였다. 주말에 좋은 핑계를 만들겠다는 듯 신상 부츠를 신었는데 “오늘 착화식”어때요?
그는 장난스러운 쪽지에 “좋지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뭉게구름 속을 걸어가듯 하루가 가벼워졌다.
그와 손깍지를 끼고 명동을 지나 종각까지 걸었다.
아방궁 음악다방에서 DJ에게 신청 곡을 건넸다.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은은한 조명 아래 흘러나오는 음악은, 말보다 솔직하게 우리 사이의 기류를 조용히 묶어주었다.
그와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서툴고 어설펐지만, 눈빛만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날 이후 시간은 연인의 길을 따라 걸었고, 사계절을 보내고 상견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부모님 입에서 나온 말.
“친정아버지가 안 계신 게…. 마음에 걸린다.”
그 짧은 문장이 차갑게 가슴을 찔렀다.
예단 목록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숨을 고르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사소한 돌멩이쯤으로 보이던 말은 마음속에서 점점 무게를 키웠다.
여고 시절 단짝 친구를 찾아가고, 사촌 언니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모두 다정하게 듣고 조언해 줬지만, 선명한 답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 한강둔치에 앉아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본다. 마음은 강가의 물비늘처럼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