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윤 Jan 05. 2025

엄마는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떡할거야?

그레고르는 왜 바퀴벌레로 변했을까?


“엄마는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떡할 거야?”


  작년 한때 SNS를 뜨겁게 달궜던 질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에서 시작된 이 밈은 부모님들의 대답으로 유머와 감동으로 번져나갔다. 우리 엄마도 "그럼 내 딸인데, 바퀴벌레가 되어도 키워야지" 했지만, 쓸 데 없는 공상적 질문엔 100% T가 되는 나로서는 안타깝게도 감동을 받진 않았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주인공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거대한 바퀴벌레로 변하면서 겪게 되는 고립과 가족의 냉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대학 시절 이 짧은 소설을 읽고 내가 느꼈던 충격과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왜 그레고르는 바퀴벌레로 변했어야 했을까?”


  바퀴벌레로 변하면 날 어떻게 대할거냐의 시시한 질문 말고 "왜" 변했어야 했을까? 란 질문으로 시작해보면 자칫 그레고르의 비극에만 주목했다가 놓칠 수 있었던 부분들을 챙길 수 있다. 책의 저자 카프카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로 그의 작품들은 '삶의 의미는 스스로 발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레고르가 변신 후 맞닥뜨린 고립과 절망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 사랑, 그리고 허무


  최근 들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새삼스럽게 가까이 다가온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강력하게 허무주의를 처음 맛보게 한 강의가 있었다. 수업명은 다소 자극적이었던 ‘섹스란 무엇인가’. 당시에 경희대에서 전설처럼 인기 있던 교양 수업이었다. 전공 수업신청보다 교양수업 신청을 먼저 하면서, 웬만한 인기 가수의 콘서트티켓 구입을 방불케했던 수업. 1초면 120명의 수강생이 다 차서, 더 열어주면 안 되냐는 쇄도가 많았다.


  20대 초반의 많은 학생이 피가 끓는 호기심으로 신청했고, 나도 어이없지만 그 중 한 명이었다. 가장 친했던 동기이자 남동생과 단 둘만 성공해서, '어머 야 민망하면 어떡해' 했지만, 민망할 일은 단 1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생존과 번식에 관한 진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자웅동체로 번식을 하는 지렁이, 인간을 닮은 원숭이 보노보의 생리학적 관점 등을 동태눈깔로 받아 적으며, 나는 절대 이 수업에 실망하지 않았음을 표정에 여실히 드러내는 ‘노력‘을 했었더랬다.


  수업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은 유전자를 존속시키기 위한 생존 기계"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사랑, 가정, 관계 등은 결국 번식 욕구를 아름답게 포장한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내게 이 관점은 너무 건조하고 허무하다. 미처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이 섣부르게 커진 감정과, 쉴새 없이 동화되는 연민들을 ‘사랑’ 이라는 허상에 우겨 담는 아주 아주 아주 별 볼일 없는 행위라는 거잖나. 인간은 정말 그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도구에 불과한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과 안락한 삶을 쫓으며 ‘행복’을 기준화한다. 그러나 날카롭게 숙고해보지 않은 ‘행복’이란 단어는 과연 개개인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정의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는가?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카프카와 니체 같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본질이 아닌 실존이 우선한다고 말한다. 즉,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시간과 경험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인간 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면, 언어 및 도구를 사용하며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이성을 가진 사회화가 가능한 동물.


  그러나 번잡스럽게도 rational 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관계의 결속을 벗어나 단절된 상태에서의 사람들은 그 마저도 평가할 수 없다. 대충,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게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친구의 일화가 떠오른다. 2년간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한 친구는 헤어진 지 8개월 후, 전 애인에게 연락을 받았었다. 다시 시작해보자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매섭지만, 단호하고 깔끔하면서도 강력한 실존주의의 철학을 담은 마지막을 건넸다.


“우리가 연인일 때는 서로의 변화를 수용하고 응원했지만, 지금 우리는 근 1년간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때의 너와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 때의 나를 생각하고 다시 만나자고 한 거라면, 한참 다른 결과일 거야”


사람은 하루하루 다른 경험을 하며 변한다. 그 변화는 자아를 더 풍부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와 단절시키기도 한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느냐다.



그레고르의 변신은 저주일까, 선물일까?


  그레고르의 변신은 단순히 생물학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의 소외를 상징한다. 현대인의 삶은 종종 한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경주와도 같다. 물질만능주의로 점철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대략 '돈'이 전부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 경주가 유일한 길인가?


  그레고르는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다. 바퀴벌레로 변한 자신의 처지에 적응하거나 다른 길을 찾으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는 가족의 냉대와 고립 속에서 점차 자신을 잃어갔다. 만약 그레고르가 자신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원체부터 판타지적인 소설이니 판타지를 더해본다면, 비슷하게 자기처럼 바퀴벌레로 변한 이전의 인간을 찾아볼 수 도 있었고, 바퀴벌레 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다. 한 마디로 이제 더 이상 속하지 못하게 된 인간 사회에서의 탈피를 선택해봄직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선택을 하지 못했고, 판타지가 가득 묻은 소설이지만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그레고르의 변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변신은 그레고르의 비극적 결말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매일 삶의 의미를 재발명하고, 나만의 길을 찾을 기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카프카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그레고르의 변신은, 그의 삶에 어떤 의미였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