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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윤 Jan 05. 2025

부끄러운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바로 다음 날이 사회지리 시험이었는데, 지도를 펴놓고 어디가 서울인지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경계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어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실제로 국사를 굉장히 좋아했던 나인데, 국사시험에서 꼭 하나를 틀린다면 '지도'가 포함된 문제였었다. 그런데 이제 지도로 범벅이 된 '지리시험'이라니


  곧 제 화를 못이겨 터져 죽을 것만 같은 복어 모양을 하고 있으니 어렸을 때 부터 내 공부를 봐주었던 아빠가 지도를 크게 펼쳤다. "서울을 짚어봐" 라고 했을 때 "중간쯤이겠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지도 안에 지명들을 외우지 못한 나에 대한 변명이 꽤 허섭스러워 별안간 소리를 질렀었다.


  당시 아빠는 조용히 내 사회 책을 덮고서 "외식이나 하러가자!" 하고 받아쳐주었었는데, 마음은 불편했지만 중2한테 뭐가 중요했겠나 배불리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는 동안, 내일의 시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었다. 삼겹살 냄새에 짓눌린 걱정은 서서히 배로 내려 갔다.


아빠는 다 먹고 집에 들어가기 전, 잠깐 같이 동네 산책을 하자셨다. 그리고 동네 노인정 어귀를 돌면서 "지윤아, 세상 모든 일은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거야. 네가 내일 어떤 점수를 받든 아빠는 관여하지 않겠지만 시험이 내일인데 지도에서 서울을 짚지 못하는 건 시험 준비의 과정 자체가 볼품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별안간 순살 치킨이 되어버린 나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박광철 목사가 쓰셨다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충고의 글귀들은 모아 담은  '부끄러운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다' 라는 책을 건네주셨다. 아직도 내 방 안 책장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 그 흰색 책은 이후의 나의 가치관을 점차 단단하게 해준 묘목이 되었다.


비단, 모든 일에 '과정' 이 중요하다는 일침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관점과, 어찌보면 지나치게 곱디 고운 방향의 마인드를 길러주는 인생의 또 다른 과정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게 된 덫이 된 것 같아 가끔 분노와 우울로 뒤덮인 감정으로 인해 책을 찢어버리기도 싶긴 하지만.


  그 당시 내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한다면, 벼락치기가 가능한 꽤 좋은 단기 기억력과 지금보다 날렵하고 쌩쌩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밤을 새도 거뜬 없었던 것쯤이 재료였다. 그리고 아주 살짝은 거칠게 긁힌 자존심까지 무장되어 꼬박 밤을 세우고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다니던 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전과목 평균점수 95점으로 학원광고에 올리려고 하는데 동의해줄 수 있냐는 얘기였다. 다행히 '지도'만 외웠다면 다른 교과 부분들은 머릿 속에 이미 들어있었기에 퍼즐만 맞추면 됐던 거라 가능했던 일이었기도 했다.


  이후로도 정직한 A학점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순간이기도 했으나, 사랑이 포함된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았다. 그리고 나의 과정이 진심과 정직이라면, 상대방도 그럴 줄 알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꼬박 네 번의 연애에서 두 번은 그랬었고 두 번은 그러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한다. 이번에도 난 항상 그래왔듯이 두 가지 덕목은 지켰다. 신의 있는 관계 라는 짧고 무거운 여섯 가지 글자에서 무언갈 더럽혔다면, 그 주체는 내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판단하는 내가 A인지 B인지는 혹은 C일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종종 과정이 아닌 결과로 판단이 되는 곳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이젠 나도 내가 잠시나마 속했던 그 과정에 판단을 넣어보자면,




그러게, 아빠

세상사는 과정이 참 중요한데 말야.

아름답게 끝날 수 있는 모든 결과들엔

왜 항상 얼룩이 묻어 있을까?


내가 구태여 몰라도 됐었던 일들을

남들을 통해 알게 된 거라면 내 잘못일까?


그냥 사사로이 지나갈 수 있던 일을

빙산의 일각만 보고 끝냈 수 있었을 때

덮었다면 내가 기억하는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럼 덜 아팠을까? 혹은 더 짙게 남았을까?

혹은 남기고 싶었던 게 더 컸을까?

그럼 내가 너무 바보스럽지 않아?


빌리 조엘에 대해서 썼던 글에서처럼

x.0.5가 될 수 있었을까? 지금은 가속페달이

있다면 온 힘을 다해 밟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어.


일 년 전 관악산을 같이 오르던 그 친구와 얘기 했었어.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문학부터 읽게 하고 싶은지 비문학부터 읽게 하고 싶은지. 문학과 비문학 양갈래로 덮어 씌우기엔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감성을 먼저 길러주고 싶냐, 이성을 먼저 길러주고 싶냐의 물음이었지.


그 친구는 비문학부터 읽게 하고 싶다했어

나는 여전히 문학부터 읽게 하고 싶다했지.


그 친구는 세상엔 너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으니, 단단히 준비를 마치게 해야 한다고 했어.


나는 세상에 긍정적인 것들이 많으니, 좋은 점부터 볼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다고 했거든.


아아, 참으로 동화 속이었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모습이라며 꽤 달콤하게, 그 둘을 결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언젠가 아빠는

내가 대학생이 됐을 때 말했지


너는 사람을 볼 때, 좋은 점부터 발견하고 그걸 본래의 크기보다 크게 보는 면이 있다고.

한 없이 좋은 장점이지만,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야.


뒷 문장에 힘을 더 실어줬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반쯤은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로 흐려질 수 있었을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왜 과정에 찌꺼기를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다지도 많을까?

진심이 나 혼자의 몫이었대.


오늘은 그 책을 버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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