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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왈기 Dec 16. 2024

영화 <설국열차> 감상 [★3.5]

아이를 부품으로 사용하는 사회, 그 속의 어른의 역할

 오늘은 연인과 우연히 설국열차를 얘기하다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을 '희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북극곰의 의미를 나처럼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장면이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얘기는 뒤에서 천천히 하기로 하자.




 기후 변화로 세상은 빙하기에 접어들고, 지구는 얼어붙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열차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열차는 결코 인류의 요람이 아니다. 열차의 앞부분은 특권층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뒷부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갇혀 있다.

 그렇게 '꼬리 칸'에 살아가는 주인공, 커티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고, 혁명의 불씨를 지핀다. 다른 꼬리 칸 사람들과 힘을 모아 열차의 앞부분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결국 모두의 희생을 감수하고 열차를 터뜨린다. 무엇일까? 인류의 최후 생존 터를 버리고, 두 아이만을 남긴 채 열차를 부순 이유는 가늠이 안 간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답은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장면에 담겨있다. 바닥 타일을 떼어내고 부품을 고치는 남자아이(앤디)의 발견이다.


 앤디의 손이 검게 얼어붙은 톱니바퀴 사이를 헤집는다. 기름때 묻은 작은 체구가 마치 기계의 일부처럼 박혀 있었다.


 열차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가 열차의 톱니바퀴를 고쳐야 했다. '어린아이를 공동체의 부품으로 여기는 사회'는 과연 옳을까?

 하다못해 열차 사람들은 그 아이의 희생보다 더한 가치를 얻을 수 있었나? 꼬리 칸은 꼬리 칸대로 가난에 찌들어 추악한 본성을 보이고, 앞 칸은 앞 칸대로 방탕함을 내보인다.

 열차가 무너지며 인류는 정화된다. 남은 것은 오직 요나(여자아이)와 앤디(톱니를 돌리던 남자아이) 뿐이다.

 그렇다. <설국열차>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제시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하듯 열차의 인류는 정화되고, 아담과 이브로 시작한 신화가 다시 남자와 여자만이 남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끝으로 스크린에 담긴 것은 북극곰이다. 아니, 끝이라기보단 시작이다. 이는 원시 시대로 회귀한 인류의 새로운 탄생을 보여준다. 수렵 생활을 시작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암시다.

 이제 우리 사회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해 우리들은 공부하고, 일을 한다. 열차 속 앤디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던져야 할 물음이 있다.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한 인간이 공동체의 도구로 남는 사회라면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 답은 분명하다.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아이들을 감싸듯,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이상향이 열릴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역할을 천시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미래를 내포한다.

 어린아이를 공동체의 부품으로 여기는 사회는 존속될 가치가 없다. 이 교훈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비판을 날리고 있는지,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 우리들은 아이들을 지켜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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