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부족과 결핍,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은 시골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꽤 나이를 많이 드셨다.
부모님의 가정은 그렇게 여유있지 않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윈 아빠는 어릴 때 도시에 있는 작은 할머니 집으로 건너와 학교를 다녔고,
20살이 되자마자 시험에 합격하여 기술직 공무원이 되었다.
혼자 힘으로 이뤄온게 많았고, 그만큼 본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어릴 때 시골에서 많은 형제들과 자랐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데다 여아라는 이유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늘 건강하고 해맑은 아이로 자랐다.
그런 우리 아빠 엄마는 만나서 연애를 했고,
아빠는 엄마를 먹여 살릴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서 했다.
그러다보니 사회경험이 적어 무리한 회식이나 부조리에 참는 행위와 같은 당시 회사생활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는 사회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가 하는 말과 행동들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고,
가끔씩 엄마가 강한 의견을 내비칠 때면 강압적인 행동이나 막말을 했다.
일종의 기를 죽이는 행위였겠지.
그런 행동은 자녀가 태어나고도 계속되었다.
사이가 좋을 때는 좋다가도 싸울 때는 크게 싸웠다.
나에게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가 한 명 있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 오빠는 항상 방에 들어가 있고, 어린 나는 나와서 울면서 상황을 중재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울면 싸움이 끝나서
싸울 때마다 울었던 것 같다.
아빠의 회사는 중간에 사기업으로 민영화가 되었고,
엄마가 힘든 일 하지 않게 평생 먹여 살리겠다는 목표는 조금 힘들게 되었다.
아빠가 명예퇴직을 하기 전 엄마는 취미로 일을 다녔지만,
퇴사 이야기가 나온 후로는 진심으로 일을 찾아 다녔다.
허구한날 돈 때문에 싸우는 날이 많았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서로가 예민해졌다.
엄마는 잊을만 하면 아빠가 재직 중에 주식으로 날린 큰 돈과 부도난 아파트, 친척들에게 빌려주고 못 받은 돈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아빠는 불 같이 화를 내거나 급격히 우울해했다.
다툼의 강도도 더욱 세졌다.
엄마도 이제는 참지 않았고, 아빠는 점점 더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급기야 자식 앞에서 손찌검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히는 물건을 벽이나 문에 던지기도 했으며, 밥상을 뒤엎기도 했다.
엄마가 더이상 져주지 않아서 언행으로 위협을 가한 거겠지.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나는 사춘기도 안왔던 해맑은 아이였지만,
매일 듣는 돈 얘기와 크게 싸우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급격히 어두워져 갔다.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가?
그래서 저렇게 싸우는 건가?
아빠는 왜 저렇게 됐을까?
엄마는 왜 저렇게 말할까?
사실 뭐 우리가 당장 집이 없는 상황도,
생활을 하기 위해 대출을 받거나 해야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지속적인 소득이 끊기고,
우리의 교육비와 생활비, 보험 등 고정적인 비용은 높은데
모아놓은 돈을 계속 쓰게 되니까 엄마는 너무 불안해했다.
그러다보니 아빠는 엄마한테 달달 볶였다.
30년 이상 다녔던 회사를 퇴직하면서 엄청난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받았을텐데
그걸 가족들이 이해해주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을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행동들은 절대 정당화될수도 용서할수도 없지.
엄마도 좀 더 이해심이 넓고 다정하고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처음을 겪으며, 다소 부족한 게 많은 어른들이었다.
성인이 된 나는 오빠 덕에 철없이 지낼 수 있었던 막내에서,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장녀가 되었다.
사립대에 들어간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
아빠가 퇴직한 상태에서 그 비싼 등록금을 지원도 못받은 채 생돈으로 지불해야했다.
입학 전 엄마가 나에게 일 년만 재수하면 안되냐고 물었다.
내가 1학년 때 오빠도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등록금을 이중으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빠도 사립대, 그것도 공대였다.
하지만 나는 지쳐서 재수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명문대는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어느정도 만족했고, 솔직히 그냥 다니고 싶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30만원 남짓의 월급을 생활비로 쓰며 최대한 용돈을 안받으려 했다.
주변에는 알바비를 생활비로 쓰는 친구들이 드물었다.
용돈을 받아 쓰는데 그게 부족하니까, 그리고 경험을 쌓으려고 알바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알바비는 저축을 해서 일년에 한번정도 해외여행을 갔다.
나는 그게 조금 부러웠다.
그래도 용돈을 받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부족한 돈은 조금씩 받더라도..
그러다 보니 친구들에게 대단하고 어른스러운 이미지가 되어있었다.
퇴사를 하고 아빠는 직업교육도 듣고 자격증도 취득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도 다툼은 지속되었다.
아빠는 2년 간 공부를 했고, 그 후에도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지금 와서는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아빠의 행보가 너무 대단하고 존경스럽지만,
당시 엄마의 심경은 그렇지 못했다.
아빠는 원래부터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엄마가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다니기 시작했고
당연히 집안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우리도 집안일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엄마가 하는 전부를 하지는 못했다.
나도 엄마도 손도 까딱 안하는 아빠에게 불만이 생겼다.
어릴 때부터 안해온 것도 알고, 가부장적이고 주방일은 관심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건 알겠는데
시대가 변했다.
그리고 상황도 변했다.
특히 나는 아빠가 좀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당연하게 집안일을 해야하는 사람은 아닌데
은연 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였다.
아빠는 가족을 위한 배려가
다시 괜찮은 곳에 취업을 해서 돈을 어느정도 꽤 많이 벌어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에겐 가정적인 아빠가 더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한 다툼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아빠가 예전보다는 많이 변화했고 나아졌다.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밥이 없으면 밥도 한다. 혼자 차려먹기도 하고.
다시는 손이 올라가지도 않고 물건도 던지지 않지만
부정적인 말투, 감정적인 행동, 흥분하거나 강압적인 언행, 가부장적인 마인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엄마도 감정을 크게 조절하지 않고 날카롭게 말할 때가 많다.
서로 너무 예민해졌고,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특히 아빠는 퇴사를 하고 다시 이직을 준비할 때마다 더욱 예민하고 힘들어한다.
상황들을 그리고 그 마음들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봐오고 겪고 있는 자식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힘들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놀라고,
다른 소리에는 깨지 않지만 엄마 아빠가 대화하는 소리에는 쉽게 깬다.
아빠가 많이 변했다는 것도, 속마음은 여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서툴고 자기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모습.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
내가 타격을 많이 받는다.
엄마도 말을 조심히 하는 편은 아니라, 은연 중에 확 내뱉은 말들이 아빠나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다.
그렇게 다툼이 또 반복되는 걸 보면
이제는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심장이 뛰고, 하루종일 컨디션이 안좋다.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전보다 작은 일에도 작은 소리에도 크게 반응하게 된다.
많이 바뀐건 아는데, 과거의 경험들과 트라우마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여준 크고 작은 다툼들에 나의 상처는 누적이 되었다.
특히 싸우면서도 보여지는 부모님의 약한 모습,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에게 더 큰 불안감을 안겨줬다.
부모님의 다툼 속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인 척하는, 아직도 어린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