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편
*
인생은 뭘까. 구태의연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말은 돌부리에 걸린 발걸음처럼 생각을 잠깐 멈추게 했다.
“뭐해?”
오후, 낮, 봄의 거리. 같이 걷고 있던 수정이 어깰 치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그냥 머릿속으로 이어지던 질문도 멎었고, 민서는 그녀랑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의 재밍 범위는 순조롭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가 막연하게 상상했던 대로의 범위를 곧 가질 것 같았다. 전 지구를 뒤덮는 범위의 점프 방해 장치. 확실히… 조직 내에서 영리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능력이기도 했다.
일단은, 휴가처럼 주어진 며칠간의 임무 공백 사이의 시간에 단둘이 봄나들이를 즐기기로 했다.
“아무것도. 벚꽃 예쁘다, 그지?”
“응. 예쁘네. 물어본 건 난데 지가 다시 묻네.”
“허허.”
민서는 묘하게 날카로운 수정의 감을 피하며 들었던 이런 저런 생각을 다시 뒤로 묻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굳이 모든 걱정을 앞당겨서 할 필요는 없으리라.
쭉 뻗으며 조성된 벚꽃 거리는 긴 산책로로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로 들러서 차나 걸음으로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둘도 그 사이에서,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걸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운데에 차도가 있었고, 양옆으로 그리 비좁지만은 않은 인도가 있다. 그 인도의 옆으로 주욱 심어진 벚꽃 나무들이 있었고, 가로수처럼 심어진 나무들의 안쪽은 시내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의 외곽 길을 따라 걷다가 내부로 들어가고, 또 정해진 장소에 마련된 나들이 장소를 구경하다가, 돗자리라도 깔고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인 경로였다.
그저 마냥 걷는 것이 싫다면 차를 타는 수도 있겠지만, 일단 둘 다 다리가 튼튼한 편이었다. 걷는 게 부담감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여기저기서 몰려온 인파들이 들어차서 인도를 비좁게 만들고 있었고, 차도에도 여러 종류의 차들이 큰 소음을 내지 않으며 저속 운행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에 따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걷는다.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거대한 하나의 생물이 된 것처럼 일정한 흐름으로 다 같이 방향을 틀기도 하면서.
수정은 밝은 오후나, 사라진 추위에 어울리는 화사한 톤의 노란색으로 칠해진 후드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민서보다는 한참이나 작은 체구나 얇은 다리를 청바지나 면티가 감싸고 있었고.
민서는 밝은 톤의 면바지에 적당한 셔츠를 걸친 채다. 질릴 때까지 둘이서 벚꽃을 구경하다가, 산책의 마지막 즈음에는 조직으로부터 문자를 받고 다음 임무의 일정을 알았다.
당장 움직일 일은 아니었으나 머릿속으로 다시 깊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일이었다.
*
“여보.”
푹.
하는 소리가 물기가 있는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약간의 응집력을 가진 무언가에서 물이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한껏 기세좋게 한 모금 들이킨 얼음물을 최길우는 그대로 뱉어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짧은 산책을 즐기러 공원에 온 참이었는데, 식후에 마실 것을 든 채다.
두 사람은 최길우와 한현서였다.
최길우는 이십대 중반이었고, 한현서보다는 몇 살인가 어린 나이였다.
햇살이 좋은 날 벤치에 잠시 앉아 쉬어서 음료를 들이킨 순간이었는데, 한현서의 말에 리시버가 보인 반응이었다. 한현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웃음을 짓고서 당황도 하지 않았다.
“푸억.”
최길우는 순간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몇 번인가 하고 나서야 호흡이 되돌아와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한 번 생각을 해보고 별다른 반응도 없는 그녀의 표정에 착각을 했던 걸로 결론을 내렸다.
한현서는 들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며 말했다.
“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장난도 못 치나.”
그녀의 말에 자신이 바로 들었다는 생각에 최길우는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아… 그럼요. 해도 되죠.”
봄날에 따사로운 햇빛 아래에 벤치 옆으로 물이 토해지자 무지개가 생겨났, 을지도 모른다. 한현서는 여전히 싱긋싱긋 웃으면서 그를 처다 보았고, 최길우도 그리 싫지는 않은듯 그녀와 마주하며 담소를 나누며 업무 중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가 됩니까?”
스미스Smith가 물었다. 송경태라는 이름의 한국인이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외모에, 생김새보다는 나이가 많은 동안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조직의 과학 기술부의 운용을 맡고 있는 수재였다.
주로 기지에서 과학 연구소들과의 컨택은 그가 주도적으로 하고 있는 편이었고, 점퍼들에게 필요한 장비들에 대한 요구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들이 많았다.
3월 중순이 넘은 시점, 민서는 송경태와 스위스의 어느 경치가 좋은 산장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연구소 근처 야외에 있는 산기슭이었고,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때때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연구소의 직원들도 가끔 스트레스를 풀며 경치 구경을 하기 위해 바깥으로 걸음을 옮길 때 사용하곤 하는 곳이다.
작은 오두막 내부는 단출하게 지어졌고, 사람의 손이 많이 탄듯 낡았으나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나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송경태가 묻는다. 그의 물음은 민서로서도 곧잘 생각하던 것이었어서 쉽게 대답을 한다.
“어, 솔직히 말하면.”
민서는 마치 꺼내지 못할 말을 꺼내는 사람처럼 잠시 뜸을 들이다가 긴 이야기를 토해냈다.
“재밍 능력은 어떤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 같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의도대로요?”
송경태는 어린 나이처럼 보이는 표정과 얼굴에 장난기마저 서려 있지만,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진지한 눈빛을 보이는 사내다. 그에게 민서가 말했다.
“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50여 km즈음의 범위를 가졌을 때 이미 슬슬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러지 않았지만, 저 스스로 재밍 범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요.”
“호오.”
확실히 주기적으로 그의 능력은 연구소에서 체크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민서는 묘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능력 범위를 아는 듯한 낌새를 보인 적이 있었다. 점프 능력은 보통 노력과 단련을 통해서 약간의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 동작처럼 보이는 능력의 운용을 잘게 쪼개고, 과정을 이해해서 다른 방식의 효과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 점퍼들마다 약간의 이상 성질이 있을 때가 있었다. 특질의 능력을 가진 점퍼들은 계보처럼 저마다 코드 네임을 받고, 자신들만의 특별한 부분을 집중해서 개발하고는 한다.
대표적으로 쉴더가 그런 류였고, 리시버도 그런 일종에 속한다. 레이더라는 이름을 가진 옌은 확연하게 남다른 부분을 갖고 있었고.
개중에서도 타인의 점프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는 재밍 능력은 그 이상의 특수성을 자랑한다. 앉은 채로 여러 명의 점퍼들에게 강제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니.
그 스스로는 점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반대급부인 것인지, 어쩐지 상상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붙여보지만 아직까지 점프 에너지는 본격적인 연구조차 활성화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알 수 없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았다.
어쨌거나, 그런 다양한 종류의 능력들 중 이런 식으로 확연한 변천사를 가지는 것은 재머가 유일했다. 보통은 초기에 가지게 된 능력이 이후의 사용과 환경에 따라 초기 능력에서 10분의 1 근처의 변화량을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점퍼가 선천적으로 특수한 능력을 타고난 다음에, 다시 후천적으로 추가적인 효과가 능력에 나타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점퍼들에 대한 기록과 역사 속에서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능력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점프 능력을 처음 쓸 때 점퍼들이 그 사용법을 아는 것처럼, 재밍 능력또한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 지 어렴풋이 깨달았죠.”
민서의 말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물에 명확한 의지와 의도가 있어 그것의 방향성을 결정한다는 말이었다. 어찌보면 과학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또 철학적이기도 한 말이었다. 아마 이런 종류의 이론과 가설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신학에서밖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한없이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가끔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논제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과학 자체도, 선두에 선 이들이 보기에는 전인미답의 지경으로 향해 나아가는 모험에 불과했으므로. 추론과 아이디어,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영감이 없다면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학문이다.
“음……. 네. 그런 식이죠. 점차 사용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능력 범위가 증가하는 속도는 가속도를 갖고 있어요. 예전의 하루에 비해 지금 하루가 지났을 때 느껴지는 증가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점퍼 조직에서 점퍼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능력을 사용했을 때가 거의 범지구적이었죠. 지금도 전 세계에 닿을 수 있는 정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허어.”
계속해서 재밍 범위가 증가하는 방향성을 띈다는 걸 알았을 때, 애초에 연구소에서 직원들이 한번쯤은 떠올려봤던 결과가 생각보다 빨리 현실에 이르렀다. 스미스는 전혀 생각해볼 수 없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 생경함에 한숨과도 닮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는 이런 산책을 할 때면 늘 입는 윈드 브레이커 자켓을 입은 채 팔짱을 꼈다. 민서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가설이지만. 점퍼들에 대한 일종의 통제 수단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이 능력의 상한은 대충 예상이 갑니다. 아마 지구 전체가 끝일 거고, 그 이상은 의미도 없겠죠. 그리고….”
“그리고?”
흠. 민서는 자기도 확실하지는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생각보다 조금 더 전능한 능력 같네요. 어떤 사용처에 한정한다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는 표정으로 스미스가 처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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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점프 유도 장치.
생각보다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고정된 좌표가 아닌 다른 좌표로 순간이동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전략적 변화와 패러다임의 개혁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단순하게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옮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텔레포터와 마이클 샌더스가 거한 일을 꾸몄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JE를 유용해서 가변적인 위치에 활용이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되는 힘이다.
이 모든 능력들에 아귀가 맞기 위해서는, 적어도 민서 스스로는 점프를 사용할 수 없어야 했다. 그저 온전히 다른 점퍼들에 대한 카운터로서 존재해야 밸런스가 맞는 듯한 느낌.
그래서 김민서 또한 이게 맞는가, 라는 생각을 지나가듯 한 번 해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납득을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그것의 사용법에 대해서.
그의 재밍 범위가 7-8000km를 넘어서면서 민서는 또 다른 능력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텔레포터가 자신의 근처에 없는 와부 인원을 자신의 곁으로 옮겨오거나, 타인을 전송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역시 비슷한 일이 가능했다.
모든 재밍에 걸리는 점퍼들이 그 자신의 곁으로 오는 것이 고정된 능력의 사용법이었으나, 자신으로 고정된 도착지의 좌표 변화가 가능해졌다.
고정 좌표가 풀렸고, 그는 재밍에 걸려든 이들을 미리 설정해 둔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다 완벽해지고 견고한 함정이라 할 수 있겠다.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 파리지옥.
악의를 갖고 있는 점퍼들이 도약을 했을 때, 그들이 만나게 될 건 곧 자신이 찌르려던 누군가의 품이 아니라 그를 기다릴 수많은 조직원들의 총기 조준선 위일 테였다.
능력의 변화와 타인에게 행사하는 제약으로 인해 원한을 살까 걱정을 한 적이 있었지만, 별다른 어려움없이 해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3월 말, 민서가 사용할 수 있는 재밍의 범위가 10,000km를 돌파했다. 민서는 섣부르게 재밍 능력을 사용하며 점퍼들을 자극하지 않고 최대한 기다렸다. 한 자리에 몰아 넣어서 목줄을 채우기 위해서는 한 번에 끝내는 편이 좋다.
그의 능력이 완성 단계에 이를 때까지 그는 일상을 유지하고 또 다양한 임무들을 수행했다. 이전에 수정과의 나들이 도중 받았던 문자는 홍인수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의 재밍 능력을 사용해서 한 번쯤 다시 점퍼들을 소집하고 언질을 주자는 내용이었고, 그 역시 동의했다.
점퍼들 백여 명은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순응적인 사람도 있었고, 비교적 반발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범죄와 연루가 되어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악용하기에 거침이 없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원하는 시민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체에게 언질이나 알림은 가야 했다. 의사 소통 자체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으니.
이전에 행했던 하루 정도의 일과와 비슷한 일을 4월 초에 한 번 더 실행했고, 그 때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수를 그러모을 수 있었다. 점퍼 조직에 속한 23명의 점퍼들과 그 외 조직에서 관리를 하거나 연락이 닿는 십 수명의 점퍼들을 제외하고, 한 오십여 명 정도를 만나볼 수 있었다.
조직은 순조롭게 점퍼 인원들에 대한 통제력을 늘려갔다. 조직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전면에서 그들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는 이들은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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