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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alnuke Jan 03. 2025

살아진 시간과 살았던 시간

3화. 잘 지워낼 수 있을까?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에는, 특정한 사건이라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특정한 인물이라 생각했고, 한참 후에는 특정한 배경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한참 동안 생각해 본 지금은, 제가 살았던 시간이 아니라, 살아졌던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자의가 아닌 선택을 하도록 만든 사건들, 자의가 아닌 선택을 하도록 몰아붙인 사람들, 자의가 아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연약한 배경, 한참 동안 그 생각의 조각을 모아보니, 자의에 반하여 살아진 시간이 가장 상위에 위치한 카테고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출처 : Pixabay


6개월 동안 추구해야 할 저의 과제는, 지난 저의 삶 속에서 살아졌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거나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전에 MBTI 교육을 들으며, 배웠던 것 중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열등한 것을 개선하고 싶거든, 잘하거나 좋아하는 것에 오히려 관심을 더 주어야 한다.


열등한 것이 걱정된다면, 그것에 대해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잘하거나 좋아하는 것에 관심과 에너지를 더 쏟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말이었어요. 마음은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반상승, 동반하락하는 테마주식과 같다구요. 완벽히 같은 논리는 아닙니다만,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우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해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살아졌던 삶을 잊으려 하기보단 살았던 삶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저에게는 2009년부터 정리되지 않은 수만 장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외장하드, 핸드폰 등 이곳저곳에 무작위로 저장되어 있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14년 동안 한 번 열어보지도 못했었어요. 그러나, 그 사진들은 디지털 쓰레기가 아니라, 저의 20대부터 현재까지 제가 살았던 삶을 기록해 놓은 흔적이고, 즐거운 추억들이지요. 살아진 삶의 흔적이 없는, 오롯이 제가 살았던 삶이 가장 잘 담겨있는 그 사진들이 보배 같은 역할을 해 줄 때이다 싶었어요. 사진정리를 포함해서 여섯 달이라는 저만의 시간을 채울 오솔길과 냇물들을 노트에 적어보았습니다.


출처 : Pixabay


사진정리, 자전거 타기, 백패킹하기, 개인PT 받아보기, 요가하기, 글 써보기, 주식하기, 강아지랑 많은 시간 보내기...... 더 이상 적어 내려 갈 것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니, 이것이 제가 정착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인가 싶더라구요. 그리고, 주변에 접근가능한 시설이나 커뮤니티가 있어 함께할 사람들이 있는 활동들이기도 했구요. 


배우자가 있는 것도, 그래서 돌봐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루를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과, 약 기운을 핑계 삼아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을 의미 없이 증발시키기 딱 좋은 환경일테니까요. 물론, 무기력하게 증발시킨 시간도 많았어요. 그래도 최대한 규칙적으로 오전에는 요가를 하고, 오후에는 카페나 도서관에 가서 사진을 정리하는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연도별로, 장소별로 정리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리고, 동영상을 남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정리의 난이도는 한층 높아졌고, GoPro를 사서 사용한 시점부터는 편집하는 일이 참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꼬박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사진과 동영상을 정리하며 보내면서, 다양한 감정들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즐겁고 그리운 추억의 시간들만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아쉽고 안타깝고 사무치는 시간들도 함께 떠오르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제가 살았던 삶이었으니까요. 살아진 삶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저는 더 건강하고 밝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보았습니다.


출처 : Pixabay


2009년에는 제 삶에서 가장 행복한 3개월을 보냈던 캐나다 사진이 있었구요, 2011년에는 연애다운 연애를 했던, 지워지지 않은 사진들이 몇 장 남아있었습니다. 2012년에는 동남아로 짧은 휴가를 다녀왔던 사진들, 2014년에는 파리에서 인턴연수를 하며 보냈던 사진들, 2015년에는 대학원 생활을 했던 사진들과 일본을 방문했던 사진들, 2016년에는 캄보디아를 다녀왔던 사진들 등 2024년까지 사진들은 모두 정리를 했는데, 아직 동영상은 다 정리하지를 못했네요.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사진은 이 순간이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찍게 되는 것 같네요.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잘 없을테니까요. 사진 정리를 하며, 지금까지 살았던 지난날만을 골라 회상을 해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었어요.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긍정적인 에너지를 채워 넣고 한 두 겹 정도의 미움은 벗겨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았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무치게 들 때도, 그때의 행동이나 선택을 후회할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에 집착하기엔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젠 마냥 좋았던 기억으로 회상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도 느껴지더라구요. 


젊고 건강했으며 꿈이 많았던 아름다운 청년이 늙지 않고, 그 시절 사진 속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며, 매일 카페에 출근하며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백수인 사실을 망각한 채, 저만의 업무인 사진정리작업을 두어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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