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붉은 꽃등 아래, 첫 떨림

9화. 저무는 빛에 비친, 낯선 마음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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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어느덧 초여름의 문턱에 닿았다.

황궁 곳곳에는 붉은 꽃등과 흰 천이 하나둘 걸리기 시작했고, 곧 다가올 황제의 성대한 혼례식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분주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궁녀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고, 내관들은 땀을 훔치며 각 부서를 오가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선 혼례 당일의 의식 순서와 외국 사신 접대를 놓고 열띤 논의가 오갔고, 황궁의 깊숙한 곳에서는 황후의 예복을 다듬는 바느질 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 있는 이.

령황제는 그날도 자신의 처소인 자광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여전히 황금빛 실로 수놓인 용이 휘감긴 비단 커튼은 미세한 바람에 은근히 흔들리고 있었고,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름보다도 붉은빛이 강해지는 무렵이었다.


탁자 위에는 밀려든 상소문과 외교문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지만, 황제의 손은 아무런 문서도 넘기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그의 시선은 문서 위가 아니라, 허공을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의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종이 위의 글이 아니라, 한 여인의 미소와 손끝이었다.


“......또 생각나버렸군.”


령은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천천히 손끝을 접어 입술에 가져갔다.

어디서부터일까.

한 번 마주하고 난 후부터, 머릿속이 자꾸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손길, 눈빛, 그리고 은은한 미소까지 모든 것이 그의 마음속에 그날 본 자수처럼 깊이 새겨진 듯 선명했다.

그녀가 천 위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던 곡선과 꽃잎의 결은, 이제는 그의 마음에도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령은 그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렸다.
맑고 깊은 눈동자, 투명한 피부, 길고 부드럽게 흐르던 머리카락.
그녀가 올려다보며 인사하던 그 순간, 그녀의 두 뺨이 조금 붉게 물들었던 것도 또렷이 기억났다.


정무에 집중하려 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 진하게 드리워졌다.

심지어 혼례복을 완성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그는 더욱 마음의 혼란을 느꼈다.


그녀가 짓고 있는 예복은 자신의 혼례복이었고, 그녀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옷은 다른 여인의 곁에 서기위해 입을 옷이었다.


“......이 감정은 그릇된 것일까.”


그는 문득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나라의 수장으로서, 황제로서 그는 흔들려선 안 되는 자리였다.

감정을 억누르고, 때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


하지만 그녀를 향한 감정은 억누르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도, 연민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라는 사람을 더 알고 싶고, 함께 있는 시간에 안정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문득문득... 그녀가 다른 이의 곁으로 가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조용하지만 강한 아득함이었다.


령황제는 조용히 창가로 걸어 나가 창호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혼례식을 알리는 봉화가 머지않아 올라갈 것이고, 황후의 행렬을 준비하는 신호가 궁 안을 물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함 속에서,
그는 한 여인의 조용한 미소만을, 눈물처럼 고요한 시선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것인가...”


하루는 령황제가 자광전에서 조용히 붓을 내려놓고, 방 내관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불렀다.


“방 내관.”


“예, 폐하.”


방 내관은 익숙하게 조용히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령황제는 괜히 기침 한 번 하며 손끝을 탁자에 두어 번 두드렸다.


“...그, 말이다. 그 상수의 양녀, 하화에 대해...”


그는 말을 잠시 망설이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라.”


방 내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평소보다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예, 폐하. 어떤 것을 중심으로 알아보아야 할까요?”


령황제는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글쎄... 뭐, 특별히 무얼... 알아보라는 건 아니고... 그냥. 어떤 아이인지... 그... 평소의 모습이나, 성정 같은 것들...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방 내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눈꼬리를 슬쩍 올리며 입꼬리를 누르듯 다물었다.


“폐하의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평소 어떤 음식을 즐기는지, 자주 걷는 길은 어디인지, 바느질 외에 무슨 취미를 갖고 있는지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령은 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아보라는 건 아니었는데.”


방 내관은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허나 폐하, 상대를 잘 알려면 작고 사소한 것부터 아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사옵니까?”


“흠...”


령은 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기침 한 번 더 했다.


내관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해 그저 괜히 괘씸한 듯,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한 오해는 생기지 않도록... 조용히 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방 내관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정무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히, 조용히, 그리고 완벽히... 알아보겠사옵니다.”


령은 결국 피식, 아주 짧게 웃음을 흘리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괘씸하구나, 정말.”


“소신은 언제나 괘씸하옵고, 폐하께선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다 품으시는 분이시옵지요.”


령황제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조용히, 깊게, 그녀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복을 전달하기로 한 그날 아침이 밝았다.

은은한 새벽빛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고, 고요한 바람이 실내를 가볍게 어루만질 즈음.


하화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어제보다 일찍, 그리고 누구보다 조용하게.

설레임과 긴장이 뒤엉킨 손끝으로 겹겹의 옷을 다듬으며, 그녀는 천천히 준비를 마쳤다.


아버지와 마주한 작업실 한켠.


하화는 정성스레 완성한 혼례복을 보자기에 감싸, 나무 상자 안으로 조심스레 눕혔다.

그 작은 상자 속엔 단지 옷 한 벌만이 아니라, 수많은 밤을 함께 견딘 그녀의 노력과 기도, 그리고 숨결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 속에서 뛰는 맥이 유난히 분주하게 느껴졌다.


상수와 함께 집을 나선 시간은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늘은 옅은 푸름 위로 연분홍빛을 띠기 시작했고, 골목마다 서린 안개는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흩어졌다.

담벼락 너머 아침이슬 맺힌 매화 가지가 조용히 흔들리고, 길섶마다 피어난 들꽃은 고요히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덜 깬 듯한 새들이 전날의 꿈을 잇는 듯, 낮은 지저귐으로 공기를 흔들었다.


그 정적 속에서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너무도 조용했지만,

하화의 마음만은 끊임없이 파문을 그리며 깊은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점차 시야 너머로 높은 담과 붉은 지붕, 금빛 단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곧게 뻗은 길 끝으로 그들이 도착한 궁의 정문은 해를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문장은 상수를 알아보고 조용히 문을 열었고, 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하화의 눈앞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돌길을 따라 조각된 연못과 고운 정원이 이어지고,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기둥들 사이로는 정제된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구름처럼 부드럽게 깔린 아침 햇살 속, 이 모든 풍경은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처럼 아득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 두 손에 품은 이 복식 한 벌이 어떤 운명을 부르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발끝에 닿는 아침 공기만큼은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도 특별한 하루가 될 것임을.


하화와 상수는 방 내관의 안내를 받아 황제의 처소인 자광전으로 향했다.

긴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마치 오랜 여정 끝에 도달한 마지막 문턱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자광전 앞에 다다른 두 사람.

상수는 걸음을 멈추고 하화에게 조용히 말했다.


“딸아,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내가 먼저 들어가 폐하께 아뢰고 오마. 곧 부르실 테니, 신호가 있거든 바로 들어오너라.”


하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등을 조용히 배웅하듯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장막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더욱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연휘군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하화였다.


조용히 자광전 앞에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고요하고 따뜻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순식간에 미소를 터뜨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딘가 들뜬 목소리가 황궁의 복도 위를 가볍게 울렸다.


“하화야! 정말 너구나?”


연휘군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을 마주한 듯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친 걸 보니... 마침내 완성한 게로구나?”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 섞였지만, 말끝에는 묘한 따뜻함이 실려 있었다.

하화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이내 황궁이라는 공간을 의식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차분한 말투로 인사하며 연휘군과의 거리감을 지켰다.


“연휘군 마마, 평안하신지요. 이처럼 뜻밖에 마마를 뵙게 되어 송구하면서도 반갑습니다.”


그녀의 정중하고 절제된 인사에 연휘군은 잠깐 멈칫했다.

익숙했던 반가움 대신 느껴지는 거리감에, 짧은 섭섭함이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풀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딱딱하게 대할꺼니? 그러면... 괜시리 멀어진 기분이잖아~”


그는 일부러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밝은 웃음 뒤에는, 하화의 눈빛 속 자신을 향한 조심스러움이 어쩐지 멀게 느껴지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하화는 그의 넉살 좋은 웃음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곳은 궁이니까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연휘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금세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치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알겠다~ 알겠다! 너가 그렇다면 나도 따라야지~ 별수있나~”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하화쪽으로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너랑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까... 나는 기쁘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했지만, 그 속엔 어쩐지 숨길 수 없는 진심이 숨어 있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하거라. 황궁은 처음이라 낯설 수도 있을 테니 내 뭐든 도와줄것이다.”


하화는 그 진심을 느낀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그의 따뜻한 배려가 어색했던 긴장감을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마. 감사합니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퍼지는 순간, 연휘군의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두근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맑은 하늘이 작게 일렁였다.

연휘군은 그 작은 눈빛에도 괜히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억지로 웃음을 더 크게 터뜨렸다.


“하하하~ 아무렴. 네 뒤에는 이 연휘군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두거라. 필요할 땐, 언제든 기꺼이 나설 테니.”


그러면서 괜히 자신의 도포깃을 한 번 털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화는 그 밝은 태도에 조용히 웃었지만, 그가 내민 진심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알지 못했다.

연휘군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지금은 멀리서라도 괜찮다. 그냥... 네가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방내관이 하화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화는 연휘군에게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간단히 묵례한 뒤, 방내관의 부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등을 곧게 펴려 애썼지만, 그녀의 손끝은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연휘군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따스하고 다정한 배웅이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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