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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lololol Dec 19. 2024

스티그마

σ τ ί γ μ α

2장 노란빛


밤바람에 울던 문풍지 소리도 그치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해어진 창호문에 노란빛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빛줄기가 방 안에 스며들며 아직은 보드란 소년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노란빛이 소년의 볼을 스치다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비비고 나지막이 하품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밖에서는 참새가 찍찍거리고, 방문을 여니 마당 너머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논둑길 너머 낮은 산자락이 아침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들판 위로 퍼지는 햇살이 평화로웠다. 정지에서는 엄마가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궁이에 나무를 넣고 불 지피는 소리, 냄비를 옮기는 소리, 된장 구수한 냄새가 방까지 스며들었다. 


"아야, 일어나야! 해가 중천이랑께." 


엄마 목소리가 정지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이불을 더 끌어당겨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고 그냥 누워 있고 싶었다. 


"느그 성은 벌써 학교에 갔당께." 


엄마가 다시 부르자 소년이 이불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며 중얼댔다. 


"... 어쩌케 벌써 갔다요?" 


엄마는 땔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니도 얼른 일어나서 밥 묵고 가야제. 늦겄다." 


소년은 마지못해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순간, 귓속에서 삐- 소리가 나더니 눈앞이 어두워져 얼른 눈을 꼭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소년은 천천히 균형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정지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궁이 속 불꽃이 깜빡이며 작은 연기를 피워냈다. 


"엄마, 아부지는 어디 계신당가?"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는 장작을 밀어 넣다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부지야 새벽에 쟁기질하러 가셨제. 어째?"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바닥 먼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냥... 아부지 또 술 묵는 거 아닌가 해서."


엄마는 한숨을 쉬며 비땅으로 장작을 밀어 넣었다. 


"그럴 시간도 없당께. 오늘은 저녁 한토록 밭일해야 혀. 걱정 말어, 니나 학교 잘 다니면 되는 거여."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어제... 학교에서 피를 토했당께." 


엄마는 비땅을 내려놓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놀라움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뭐라냐? 피를 토했다고? 어디가 다쳤는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여?" 


소년은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학교서 갑자기... 입에서 피가 막 나불어서 수돗가에 가서 다 토해부렀어. 손도 삘거지고, 막 멈추질 않았어." 


엄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얼굴이 굳어진 채 소년을 살펴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니가 요새 몸이 허해서 그런 거 아닌가 싶다. 밥을 좀 더 잘 챙겨 묵고, 다음에 또 그러면 꼭 엄마한테 말혀라잉."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말은 믿음직스러웠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소년이 정지에서 나와 마당을 지나고 있을 때, 낮은 돌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야! 학교 가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돌담 너머로 단짝 친구 승철이가 서 있었다. 작은 어깨에 교과서 몇 권을 얹고 흔들며 소년을 재촉했다. 


"얼른 나와라잉. 또 늦겄다." 


소년은 망설이며 걸음을 옮겼다.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던 승철이가 이상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니 왜 이렇게 처져 있냐? 어디 아픈 거 아녀?"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녀. 근디 승철아, 너는 입에 막 피가 나본 적 있냐?" 


승철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피? 아니 없는디. 어째 그러냐?" 


소년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녀. 그냥 물어본 거여." 


그러나 승철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다그쳤다. 


"아따, 먼 일이여?"


"어즈께는 입에서 막 피가 쏟아지는디 죽는 줄 알았당께." 


승철은 순간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 해봐. 내가 한번 봐볼 테니께." 


소년은 당황하며 머뭇거리다 입을 살짝 벌렸다. 승철은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허고라. 아무것도 없구만. 그냥 니가 몸이 허해서 그런 거 아녀?"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말했다. 


"긍께. 그라제?" 


승철은 손짓하며 앞서 걸었다. 


"얼른 가자잉. 오늘 또 늦으면 선생님한테 혼나부러." 


소년은 승철이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그 무거움을 잠시 덜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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