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균형 사이
"아래의 모든 스토리와 등장인물, 지명 등은 모두 허구로 만들어낸 픽션입니다.
그냥 재미로 봐주세요. 이야기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ep.1 ~ ep.6)
월요일 아침.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팀원들이 하나둘씩 소회의실에 앉았다.
정기훈 팀장은 이미 노트북을 켜놓고 실장의 보고 일정이 적힌 문서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 다들 모였으면 이제 회의 시작합시다.”
조용히 시작된 회의의 경적을 깨듯 조민서 대리는 준비된 자료를 앞에 펼치고 정리하느라 바빴다.
옆 자리의 이하준 대리는 주말의 여독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며 자리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다.
“이 대리, 거 하품 좀 적당히 하지. 주말에 뭐 했길래 월요일 아침부터 이렇게 힘들어하나.
하품하면 옆 사람한테도 금방 옮는다고.” 정 팀장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 예, 죄송합니다. 주말에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 하하" 이하준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이에 정 팀장도 더는 캐묻지 않고 회의를 시작하자는 눈짓을 줬다.
“오늘은 주간 일정 보고 안건부터 정리합시다.
특히 해양 관광단지 개발 건은 실장님이 아주 예민하게 보고 계시니까 다들 준비 잘해주세요.”
정 팀장의 말이 나오자 이내 강도윤 과장이 대답했다.
“보고자료는 준비 완료했습니다. 다만 현장 실사 일정은 조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직 실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옆에 있던 조민서 대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일정은 그렇다 쳐도, 주민들 민원 대응은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지난주까지 들어온 항의가 너무 많아요.”
그러자 이하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아니, 관광단지 만들어서 사람들이 놀러 오면 좋잖아요? 왜들 그렇게 반대하는지...
다들 바다 보면서 힐링 좀 하면 좋을 텐데요.”
“이하준 대리님, 주민들 생계가 달린 문제인데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마세요.”
조민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이하준에게 쏘아붙였다.
이를 지켜보던 정 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 했다.
“이하준 대리, 농담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중요한 시점이니까 집중합시다.”
“나정원 주임, 민원 대응 자료 준비했나요?”
나정원은 정 팀장의 질문을 예상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 네, 준비는 했는데... 한두 가지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
“팀장님, 복사한 자료 여기 있습니다!” “앗, 죄송합니다...”
이때 박민수 인턴이 복사한 자료를 들고 급히 뛰어오며 자료를 나 주임에게 넘기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를 지켜보던 정 팀장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팀은 정신없고, 민원은 쌓여 있고, 위에서는 추진실적 좀 보자고 하는데... 하... 오늘 하루도 길겠군.”
“이번 주는 잘해봅시다”라고 정 팀장은 애써 팀원들을 독려하며 힘겹게 말했지만,
회의가 끝난 뒤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사옥에 있는 지하 1층 매점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향긋한 커피 냄새와 함께 빵을 고르는 직원들.
이른 아침 출근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모였는지, 테이블에 앉아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정원 주임은 어제 실수한 보고서 생각에 입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하루의 시작은 커피와 함께라는 생각에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매점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트레이에 올리고 커피를 주문하려고 계산대 앞에 섰다.
그때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주임님? 여기서 보네요."
기획예산팀 이태준 주임이었다.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 이 주임님. 여기서 다 뵙네요. 커피 사러 오셨어요?"
이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들고 있는 블랙커피를 살짝 들어 보였다.
"네, 요즘 통 잠을 못 자서요. 이거라도 마셔야 버틸 수 있죠."
둘은 계산을 마치고 매점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태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요즘 버티는 것도 쉽지 않네요. 위에서는 기획예산팀이니까 예산 책임지고 줄여라,
재무상황 보고서 만들어라, 또 이거 해야 저거 해라 그러면서 자꾸 오더는 떨어지는데,
정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생각하지 않잖아요."
나정원도 샌드위치를 쪼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현장 팀이니까 주민 민원부터 공사 일정까지 뭐 하나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실장님은 성과만 보고 이야기하니까... 뭐랄까, 정말 말이 안 통해요. “
이태준은 피식 웃으며 컵을 돌렸다. "그래도 정기훈 팀장님은 팀원들 챙겨주시는 편이잖아요.
저희 차 팀장님은 딱 보고서만 보거든요. 그러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자료 다시 가져오세요' 이거예요." 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정원은 빙긋 웃었다. "뭐, 정 팀장님도 만만치 않아요. 평소엔 괜찮은데, 윗선 보고가 걸리면
엄청 예민해지세요. 어제도 보고서 때문에 눈치 엄청 봤죠."
이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하긴, 어디든 그런 건 비슷하겠죠.
그런데 나 주임님, 보고서 어제 다시 고치셨다면서요?"
나정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소문 참 빠르네.”
“뭐,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해야죠. 사실 실수한 건 저도 아니고 우리 팀 인턴인데...
일단 보고서는 제가 확인했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죠.”
이태준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물었다. "박민수 인턴이요? 인턴이라 아직 좀 서툴죠? 일하는 건 어때요?"
나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수는 자주 하지만 열심히 하려고 하긴 해요.
문제는 그게 팀 분위기까지 영향을 줄 때가 있다는 거죠. 가끔은 좀 답답할 때도 있고요. "
이태준은 뒤로 의자에 기대며 웃었다. "인턴의 실수가 주임님 스트레스가 되는 거, 그건 어쩔 수 없죠.
저희 팀도 고 인턴이 엑셀 틀렸을 때... 아, 말도 못 해요. 차 팀장님이 실장님 보고 직전에 확인하고,
저한테 난리 치셨거든요. 결국 제가 다 고쳤죠. "
둘은 그렇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이태준은 잔을 비우고 나서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 어차피 인정도 못 받고, 성과는 팀장님 거고."
그러자 나정원도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저도요. 뭘 하든 결국 결과로 나타내야 하니까 어려워요. 진행과정도 좀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 그래도 월급날 생각하면서 버티죠. 월급날만 기다리면서요.”
이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요, 월급날은 직장인의 마지막 희망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요?"
그 말에 나정원도 피식 웃었다. 둘은 그렇게 가볍게 웃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매점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그녀와 그 둘 사이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자리 잡았다.
홍보팀 사무실은 아침부터 즐거워 보였다. 문성태 팀장은 잠시 회의를 나가 자리를 비웠고,
팀원들은 그 틈을 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진수 씨, 요즘 필력 좋던데요?" 김주연 대리가 웃으며 박진수를 바라봤다.
"지난번 사장님 홍보 기사 카피도 진짜 괜찮던데."
박진수 주임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맞받아쳤다.
"대리님 보기에도 그렇죠? 요즘 제가 좀 해요. 하하. 모름지기 카피는 감동이 있어야죠.”
윤태경 과장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말을 보탰다.
"그러게요. 근데 진수 씨, 그 감동이라는 게 가끔 너무 과하지 않아요?
지난번 보고서 헤드라인은 거의 시였잖아요."
사무실 안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으레 그렇듯 팀장이 없는 사무실은 누구도 업무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
모두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던 그때, 문성태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굳은 표정으로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나 빼고 다들 즐거워 보이네. 다들 모이세요." 문성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사무실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팀원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눈치 보듯 하나둘 회의 테이블 주위로 모였다.
문성태는 의자에 앉으며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보도자료 초안이 담겨 있었다.
그중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장님을 이렇게밖에 못 띄워주는 건가요?"
김주연 대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팀장님, 이번 초안은 최대한 사실에 기반해서 과장되지 않게 작성했는데요.
과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봐..."
문성태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역효과? 주연 씨, 그건 기자들이 걱정할 문제고, 우리는 우리 일이 있어요.
사장님을 돋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이건 돋보이긴커녕 밋밋하기 짝이 없잖아요."
이때 윤태경 과장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을 꺼냈다.
"팀장님, 그럼 제가 한 번 수정해 볼까요? 수치를 좀 더 강조하거나, 임팩트 있는 헤드라인으로 바꿔서요."
문성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윤 과장, 수정은 필요 없어요. 새로 써야 한다고요. 완전히 새로.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이겁니다." 문성태는 파일 한 장을 집어 들고 목소리를 키웠다.
"기획조정실에서 추가 요청이 왔어요. 사장님 업적을 더 부각하라는 거예요. 이번 보도자료는 단순히 기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금요일에 있을 지역 기업 협력 간담회에서 발표 자료로도 사용될 겁니다."
문성태는 말을 이어갔다. "지역 기업 협력 간담회는 우리 회사가 지역 경제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알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장님이 직접 우리 프로젝트와 회사 비전을 설명하실 예정이에요. 우리가 준비한 자료는 발표의 핵심이 될 거고, 언론에서도 이 내용을 그대로 다룰 겁니다. 이건 홍보팀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그럼 기획조정실에서 작성하면 되지 왜 홍보팀에게 시키는 거야.’라고 윤태경은 항변하고 싶었지만,
발끈하는 팀장의 성격을 잘 알기에 꾹 참으며 다시 얘기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제가 김주연 대리와 함께 방향을 다시 잡아 보겠습니다."
문성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좋아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오늘 중으로 완성된 초안을 내 책상 위에 올려두세요. 오늘 안으로 끝내지 않으면 우리 팀이 곤란해져요."
김주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
문성태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다들 명심하세요. 홍보는 작은 거라도 성과를 잘 포장해야 합니다. 결과가 중요하다고요.
과정은 아무도 기억 안 해요. 사장님이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회의가 끝나고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농담이 오갔던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고, 문성태는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보이는 게 중요해.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게 아니라고."
점심 이후 정기훈 팀장이 실장실로 잠시 들어간 사이, 지역개발사업팀 사무실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무실에 남은 팀원들은 긴장은 풀렸지만, 표정에서 미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강도윤 과장은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를 들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다음 주에 현장 실사를 나가라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직 기본 계획도 완전히 정리 안 됐는데, 가서 뭘 확인하라는 건지."
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조민서 대리를 바라봤다. "민원도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주민들 반응이 어떤지 알면서 왜 이런 일정을 밀어붙이는 건지 모르겠네요.”
조민서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며 차분히 대꾸했다. "저도 그 부분 때문에 어제 팀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지금 주민들 반응은 거의 폭발 직전이에요. 특히 어촌계 쪽에서 어업권 문제를 제기한 게 제일 커요. 관광단지가 들어서면 기존 어업 활동이 제한될 거라는 걱정이 크더라고요.”
"그러니까, " 강도윤이 말을 이어받았다. "환경영향평가 결과도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현장에 가서 주민들한테 뭐라고 설명할 건데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나정원 주임이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민원 정리하는 게 제 업무인데요, 요즘 매일 전화가 쏟아져요. 지난주에는 심지어 주민 한 분이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셨는데, 결국 상황 설명만 하다 돌아가셨어요. 솔직히 저도 감정적으로 힘들어요.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겠지만, 저희가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요. "
이번엔 이하준 대리가 목소리를 높여 거들었다. "강도윤 과장님, 우리는 공기업이니까 더 어려운 거잖아요. 민간 기업이면 사전 협의도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절차를 다 밟아야 하잖아요. 이 사업은 규모가 커서 경제성 검토, 기술적 타당성 검토, 사업계획 수립, 예산 확보, 그리고 실시계획 수립까지 아직 남은 단계가 많아요. 이 시점에서 현장 실사 간다고 해서 얻을 게 없죠.”
조민서는 이하준의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보기엔 지금은 주민 의견 수렴에 더 집중해야 해요. 실제로 주민들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으면 나중에 사업 추진 단계에서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요.”
"정부 정책이라서 기획조정실에서 실적을 만들고 싶은 건 알겠는데, 계속 일정을 앞당기려고 하니 현장에선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죠." 강도윤은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우리는 보고서에 적힐 몇 줄 때문에 고생하는 건데, 정작 주민들은 이 사업이 자기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는 거고요."
"그게 제일 문제죠." 나정원이 힘없이 웃었다. "제가 최근 민원 처리하면서 느낀 건데, 주민들 대부분은 단순히 반대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협의가 부족한 게 문제 같아요."
이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팀장님도 그 부분에서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요. 윗선에서는 실적 압박이 심한데, 현장에서는 이렇게 민원 문제가 크니까요. 실장님은 성과만 보는데, 우리가 감정적으로나 업무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알겠어요?"
조민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에 현장 실사 나가게 된다면, 최소한 주민들한테 확정된 사항은 없더라도, 우리가 의견을 들으러 왔다는 메시지는 전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없으면 더 반발이 심해질 거예요."
강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의견을 들으러 간다고 해도, 주민들이 믿을지 의문이라는 거죠. 이미 불신이 너무 커요."
사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모두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고서 위로 쏟아지는 민원과 실적 압박 사이에서, 누구도 해결책을 명확히 내놓을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홍보팀은 오전 내내 분주했다. 문성태 팀장이 아침 회의에서 지역 기업 협력 간담회 기사 초안을 오후까지 작성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김주연 대리는 컴퓨터 앞에서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윤태경 과장은 자료의 수치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주연 씨, 이 부분 좀 수정해야겠어요." 윤태경 과장이 손에 든 자료를 내밀며 말했다. "지난해 이 사업으로 창출한 일자리가 정확히 450개인데, 여기선 400개로 잘못 적혀 있어요. 그리고 이 중 청년 일자리가 45%를 차지했다는 점도 강조해야 합니다. 이런 고무적인 결과는 꼭 포함해야 해요."
김주연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자를 멈췄다. "알겠습니다. 다시 확인할게요. 그리고 협력업체 매출 증가 부분은 괜찮나요? 전년 대비 평균적으로 28% 상승했다고 적어놨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강조가 되겠죠?"
윤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눈에 띄는 성과죠. 대신 28%가 어느 정도인지 금액으로 환산해서 함께 보여주세요. 그리고 여기서 사장님의 비전도 강조해야 할 것 같아요. 지방정부와의 협력 계획, 청년 일자리 확대 같은 미래지향적인 내용도 넣으면 더 좋을 겁니다."
김주연은 바로 해당 부분에 추가할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적을게요. '앞으로도 지방정부와 협력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이 문장이 간담회의 주제와 잘 맞겠죠?"
윤태경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간단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잘 잡았어요. 그리고 '사옥의 일부 공간을 활용한 스타트업 인프라 확대'라는 문구도 꼭 들어가야 해요. 그 사업 덕분에 많은 스타트업들이 성장했다는 점을 언급하면 간담회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보일 겁니다."
윤태경과 김주연이 기사 작성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문성태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분위기 아주 뜨겁네요. 좋습니다." "이번 간담회 기사에서는 사장님의 비전을 강조합시다. 사장님께서 이 사업을 직접 챙기시면서 지역 기업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이런 성과를 만들어내셨다는 점을 부각하는 게 중요해요. 구체적인 수치도 좋지만, 이런 리더십과 비전이 돋보이도록 포장해야 합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팀장님. 성과와 수치는 물론이고, 미래 계획까지 담아서 설득력 있게 작성 중입니다. 주연 씨가 열심히 작업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문성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주연이 작성 중인 원고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 부분 좋네요. 특히 지방정부와 협력하는 부분은 사장님께서도 직접 강조하신 내용이라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간담회는 단순히 성과 발표가 아니라, 지역 사회와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는 자리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해요."
김주연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팀장님, 혹시 추가할 부분이 있을까요?"
문성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사 말미에 사장님의 메시지를 추가해 주세요. '우리 회사는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선도해 가겠습니다' 같은 포괄적인 메시지로 마무리하면 좋겠군요."
김주연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내용을 추가하며 팀장을 바라봤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기사에 무게감이 더 실리겠네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럼 빨리 마무리하고 바로 출력해서 보여주세요. 확인해 봐야지." 문성태는 본인이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기까지 믿지 못하겠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김주연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발길을 서두르는 퇴근길. 회사 인근의 먹자골목은 어느새 맛집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역개발사업팀 나정원 대리는 한 손에 핸드백을, 다른 손엔 핸드폰을 쥔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퇴근 후 팀장님의 날카로운 눈초리에서 벗어난 해방감 때문인지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 주임님! 여기요!"
호프집 입구에서 기획예산팀 이태준 주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채,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정원을 맞이했다.
"오늘 약속 잡은 거 나잖아요. 근데 먼저 오시면 어떡해요?"
나정원이 미소를 지으며 불만 섞인 농담을 건네자, 이태준은 가볍게 소맥을 섞으며 대답했다.
"뭐, 먼저 오는 사람이 자리 잡고 있으면 되죠. 그런데 박민수 인턴도 온다면서요? 그 친구는 술자리에서 처음 보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프집 문이 열리며 박민수가 들어섰다. 정장 넥타이는 살짝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그 특유의 활기 넘치는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민수 씨 어서 오세요. 이쪽에 앉으세요." 나정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정원 주임님, 요즘도 팀장님 눈치 보느라 힘들죠?" 박민수가 자리에 앉자 이태준이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정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다기보다... 이제는 그냥 익숙해졌다고 해야 하나요. 매일 보고서 수정, 민원 대응에 시달리다 보면 제 일이 뭔지도 헷갈려요."
박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요, 인턴 입장에서 봐도 정말 많은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보고서 복사하고 자료 준비하면서도 제가 어떤 업무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민수 씨는 요령이 생기고 있잖아요. 처음엔 실수도 많았는데 요즘엔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나정원이 그를 격려하자 박민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런데 회사 일이란 게 참...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주임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해내세요?"
이태준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잘한다기보다 버티는 거죠. 업무가 아무리 힘들어도 어쨌든 시간은 가잖아요. 그런데 민수 씨, 요즘 회사 분위기 어때요? 인턴으로 보기에."
박민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솔직히 좀 딱딱한 것 같아요. 저희 팀은 다들 바쁘셔서 대화할 시간도 없고, 분위기가 가끔 무거울 때가 많아요."
"그건 우리 팀만 그런 게 아니야. 요즘 다 비슷하죠." 나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도 이태준 주임님 팀은 분위기가 좀 더 유쾌하지 않아요? 예산팀은 다들 조용할 줄 알았는데."
박민수는 이태준을 보며 동의를 구했다.
"유쾌하긴요." 이태준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팀장님도 보고서 아니면 말도 잘 안 하세요. 다들 일만 하느라 딱딱하긴 마찬가지예요. 민수 씨가 착각한 거죠."
세 사람이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며 웃음이 번지던 그때, 나정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혜진 씨? 지금 뭐해요? 우리 여기 호프집에 있는데 올래요? "
나정원은 오혜진 인턴이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한 동네에 사는 주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코드가 잘 맞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조금 뒤 그녀가 도착하자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네 사람은 서로의 직장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개봉한 로맨틱 무비 '그와 그녀의 시간'으로 옮겨갔다. 영화는 서툰 사랑을 통해 서로의 성장과 이해를 그린 내용으로, 주인공 도현우는 능청스럽지만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니, 도현우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장미를 들고 비 맞으면서 고백하는 거! 정말 설레지 않았어요?" 나정원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오혜진도 맞장구쳤다.
"그 장면요? 와, 저도 심장 떨리던데요. 현실에서 그런 남자가 있을까요? 재치 있으면서도 진심이 담긴 그 대사... 아, 너무 멋있었어요. "
이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던졌다.
"뭐, 그런 배우도 좋지만, 결국 영화는 영화일 뿐이죠. 그런 사람이 실제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떡하나요?"
나정원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왜 우리 회사엔 그런 멋진 사람이 없을까요? 맨날 보고서, 회의... 로맨스의 '로'도 없어요."
"진짜요. 그런 사람이 회사에 있다면 매일 출근할 맛 날 텐데." 오혜진이 덧붙이자 박민수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 있으면 제가 부장님께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이상한 일 생기기 전에요."
대화는 점점 유쾌해졌다. 이때 주문한 치킨이 나왔다. 노릇하게 튀겨진 치킨에서 매콤한 향이 피어오르자 네 사람은 동시에 "와!"를 외쳤다.
"이 치킨 진짜 바삭하고 매콤하네요. 이 맛에 퇴근 후 술 마시는 거 아니겠어요?" 나정원이 치킨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러게요.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을 땐 이런 게 딱이죠." 이태준도 치킨을 들고 동의했다.
박민수는 맥주를 들며 건배를 제안했다. "그럼 선배님들, 우리 모두 치킨과 맥주에 감사하며 건배할까요?"
네 사람은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외쳤다. 대화는 다시 영화에서 현실로 옮겨갔다. 남자 직원들은 현실적으로 여자친구가 더 중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여자 직원들은 그런 현실적인 태도가 가끔은 재미없다고 웃으며 놀렸다.
"민수 씨, 이렇게 즐거운 자리가 매주 있으면 회사 생활도 꽤 괜찮겠죠?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20대잖아요."
나정원이 말하자 박민수는 활짝 웃었다. "맞아요! 이제 팀장님께 매주 술자리 팀 예산을 요청해야겠네요."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네 사람은 서로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가며 친근함을 더했다. 시간이 흘러 호프집 안의 소음도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네 사람의 웃음과 대화는 계속되었다.
"다음에는 또 어디서 모일까요? 오늘처럼 재미있게요." 나정원이 제안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렇게 네 사람은 한밤중 먹자골목의 작은 호프집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돈독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