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균형 사이
(ep.7 ~ ep.9)
나정원 주임은 출근하면서도 전날 밤의 호프집 모임이 떠올랐다. 퇴근 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동료들과 나눈 유쾌한 대화 덕분에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도 힘내보자.'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침의 상쾌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정기훈 팀장의 굳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렇게 부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보고를 올릴 수가 있어!" 정 팀장이 소리치며 사무실로 씩씩대며 들어왔다.
나정원은 자리에서 정기훈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긴장된 마음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정 팀장은 실장에게 보고했던 자료가 본부장 회의에서 지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팀장님, 보고서 작성 전에 데이터를 다 확인했는데요. 예산팀에서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예산팀? 그게 지금 변명이 돼? 우리 팀 이름으로 올라간 보고서잖아! 결국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한다고!" 정 팀장은 책상을 내리치며 팀원들을 둘러봤다. 박민수 인턴은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서류를 붙잡고 있었다.
"일단 자료 확인해서 실장님께 다시 보고할 거니까 나 주임이 예산팀과 연락해서 데이터 문제 바로 잡아. 그리고 이 대리, 조 대리, 둘 다 이번 주 일정 보고 수정해서 올려. 앞으로 이런 일 다시는 없도록 하라고!” 나정원의 보고서로 시작된 문제는 이하준과 조민서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나정원은 눈치를 보며 예산팀 이태준 주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태준은 평소 꼼꼼하고 실수 없기로 유명했지만 이번만큼은 어딘가 이상했다. 나정원이 전화를 걸자 이태준의 목소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주임님, 무슨 일로? "
"이 주임님, 저희 보고서에 사용한 예산 데이터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지난번에 주신 자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태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아, 그 자료요. 음... 제가 늦게까지 수정하고 넘긴 자료라 다시 검토는 못 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나정원은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자료 기반으로 작성된 보고서가 오늘 본부장님 회의에서 지적받았어요. 예산 수치가 틀렸다고..."
이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확인해 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나정원은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태준으로부터 메신저가 날아왔다. "제가 엑셀 함수 적용을 잘못해서 계산된 값이 틀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상외로 너무 간단한 실수인 것을 알자 나정원은 이태준의 메시지를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작은 실수가 보고서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본부장이 보고서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나정원은 이 문제를 팀장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 팀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잘못된 자료를 제공한 예산팀보다 보고서 작성자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컸다.
"나 주임님, 제 실수입니다. 필요하면 제가 직접 정 팀장님께 가서 말씀드릴게요." 이태준이 제안했지만, 나정원은 혼자 고개를 저으며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요. 이 주임님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저도 확인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정 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기에 앞서 나정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냥 이 주임님 실수라고 할까? 아니면 내 잘못이라고 감수해야 할까?'
나정원은 용기를 내어 정 팀장 앞으로 갔지만 여전히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움츠려 들었다. 그는 자료를 들고 나정원을 바라봤다. "데이터 문제 해결됐나?"
나정원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예산팀에서 제공한 자료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엑셀 함수 적용에서 잘못된 값이 계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를 발견하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이 주임님도 사과하겠다고 했습니다."
정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좋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 보고서는 오늘 중으로 수정해서 실장님께 제출해.” 정기훈도 더 이상은 말을 아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리로 돌아온 나정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며칠 전만 해도 지역개발사업팀은 당장 다음 주로 예정된 현장 실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 빗발치자 상황이 급변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사업의 투명성과 정당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다양한 통로로 민원이 접수되자 윗선에서도 당장의 현장 실사보다는 주민들의 의견을 한 번 더 수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현장 실사는 전격 취소되고, 대신 주민 공청회를 한 번 더 개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계획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자 지역개발사업팀 사무실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무엇보다 공청회가 시간적 여유 없이 급박하게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정기훈 팀장은 회의실에 팀원들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렸다.
"여러분, 이번 공청회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우리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오해를 풀고, 신뢰를 쌓을 기회입니다. 위에서 공청회 개최를 빠르게 결정한 데에는 민원이 크게 작용했으니까, 우리는 오히려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강 과장님을 중심으로 공청회 계획을 수립하세요. 사회는 내가 볼 테니까, 모든 자료와 시나리오를 꼼꼼히 준비해 주세요."
강도윤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공청회 계획 수립하면서 주민 질문에 대비한 예상 답변도 준비하겠습니다. 나 주임님, 민원 처리 경험이 많으니 질문 패턴 분석을 부탁드립니다. 이하준 대리님, 조민서 대리님은 발표 PT자료 작업 맡아주세요.”
정기훈 팀장은 이어서 말했다. "특히 어촌계 주민들의 어업권과 일부 지역 개발에 따른 보상 문제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그 부분에 집중해 주세요. 준비 기간이 이틀밖에 안 돼요. 빨리 정리해서 보고하고, 공청회 일정 잡아야 하니까 모두 준비 잘해주세요.”
회의가 끝난 뒤 팀원들은 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업무를 시작했다. 나정원은 강도윤과 함께 민원 자료를 검토하며 주민들이 가장 많이 제기한 문제를 정리했다.
"강 과장님, 여기 보세요. 민원의 70%가 어업권 및 토지 보상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교통 혼잡이나 공사 소음, 일상생활 불편 등에 대한 내용인데요. 어촌계가 제기한 문제는 조금 더 디테일하게 대응해야 할 것 같아요."
강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분들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죠. 우리가 얼마나 신뢰를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공청회 분위기가 좌우될 겁니다."
이하준과 조민서는 발표 자료 PT작업에 몰두했다. 이하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민서를 바라봤다.
"조 대리님, 자료를 깔끔하게 만들면 뭐해요. 결국 주민들이 원하는 건 우리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말을 얼마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잖아요."
조민서는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힘든 거예요. 잘 들어줄 준비도, 잘 설명할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박민수 인턴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주민들이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예상해서 답변을 준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지 않을까요? 질문이 예상 밖으로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
나정원은 미소를 지으며 박민수를 바라봤다. "맞아요, 민수 씨.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걸 하고 있는 거죠. 다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공청회가 진행될까 봐 걱정인 거예요.” “아, 맞다. 우리 회사에도 과거에 공청회를 경험했던 선배들이 있을 텐데, 그분들께 조언을 구해보는 게 어떨까요?"
조민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선배들의 경험을 듣는 것도 좋고, 다른 기관에서 공청회를 어떻게 하는지 참고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만의 방식으로 준비하다가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강도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나 주임님과 조 대리님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쪽으로, 이하준 대리님은 다른 기관의 사례를 조사하는 걸로 하죠. 박민수 씨도 이 대리님과 함께 해요. 저도 관계기관 몇 군데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요."
갑작스러운 계획의 변경에도 공청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던 팀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해 갔다. 강도윤과 이하준은 다른 기관의 사례를 찾고, 나정원과 조민서는 선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박민수는 상황이 급변했는데도 선배들이 빠르게 대응하는 걸 보며 조금씩 업무를 익혀가고 있었다. 사무실은 분주했지만, 팀원들 사이에는 점차 긴장감 대신 실질적인 준비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무실 한쪽에서 자잘한 대화가 오갔다. 나정원 주임이 화면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이준혁 과장님 오늘부터 우리 팀에 오신다면서요? 근데, 원래 어떤 분이셨죠? 제가 잘 모르겠어서요."
조민서 대리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기획예산팀에 계셨던 분이에요. 꽤 큰 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들었는데, 팀워크는 별로라는 소문도 있었죠. 그리고 이번에 본부장님이 직접 인사처에 요청해서 인력을 보강한 거래요.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려는 의도겠죠."
나정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본부장이 직접 요청했을 정도라면 성과는 확실했던 모양이네요. 그런데 왜 팀워크 얘기가 나오는 걸까요?"
조민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요. 어쨌든 오늘부터 같이 일해야 하니 지켜봐야겠죠."
그때 문이 열리며 정기훈 팀장이 들어왔다. 그는 팀원들의 시선을 한 번 쓸어보며 말을 꺼냈다.
"오늘부터 이준혁 과장이 합류합니다. 기획예산팀에서 훌륭한 성과를 낸 분이니, 앞으로 우리 팀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세요."
문이 열리고 중간 키에 말쑥한 외모의 이준혁이 들어섰다. 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안녕하세요. 이준혁입니다. 오랜만에 복직하게 됐는데, 지역개발사업팀에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기훈 팀장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다들 이 과장님께 인사들 나누세요. 앞으로 함께 할 일이 많으니까요."
팀원들이 돌아가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어딘가 어색함이 감돌았다. 나정원은 곁눈질로 조민서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말은 잘하시네요."
조민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앞으로 보죠. 첫인상만 가지고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잖아요."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팀원들은 삼삼오오 나갈 준비를 했다. 이준혁은 조심스레 나정원에게 말을 걸었다. "나 주임님, 이 팀에서 어떤 일을 주로 맡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정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민원 대응과 현장 관리 쪽을 주로 하고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는 주민 협의가 중요해서 신경 쓸 일이 많죠."
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어려운 점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반면, 사무실 한쪽에서 강도윤 과장은 이준혁을 흘낏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경험은 많다지만, 과연 여기서도 잘할 수 있을까?’ 그의 말투는 다소 경계하는 듯했다. 나이는 강도윤이 많았지만 직급은 둘이 모두 과장으로 같은 해 승진을 했다.
그날 오후, 이준혁은 정기훈 팀장과의 1:1 미팅에서 그의 복직 후 첫날 소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정기훈 팀장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과장님, 첫날이라 정신없었죠? 팀원들이 다들 좀 낯설었을 거고."
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팀장님. 솔직히 좀 긴장도 됐고,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습니다."
정기훈은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죠. 이 팀은 현장에서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이 과장님이 기획예산팀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이준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팀장의 말을 들으며 대답했다. "네, 팀장님. 현장이 어떤 곳인지 배우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빠르게 찾아보겠습니다."
정기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초기에는 나 주임과 민원 대응을 함께 맡아주세요. 주민들과의 소통이 이 사업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체감하실 겁니다. 현장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배우는 자세로 임해주시면 됩니다."
이준혁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기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마세요. 현장은 계획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유연함과 책임감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준혁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어색함과 긴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새로운 출발은 그렇게 기대와 걱정으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