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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17)

밤편지 - Wonderwall(Oasis)

by 박경민
“늦은 밤 혼자 재즈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각자 이유가 있잖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미연은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당신은요? 먼저.”
“전… 생각이 너무 클 때 여기 와요. 큰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가라앉더라고요.”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여긴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곳이니까.”
미연은 그 말이 이 바의 공기와 잘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선 가끔 시간이 겹치더라고요. 지금... 저희처럼요."
미연은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잠시 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는, 그의 질문 방향을 돌리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저는…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요.
누군가의 기준, 누군가의 요구, 누군가의 불만.
그러다 보면 제 목소리가 작아져요. 그래서… 잠깐 쉬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시나 봐요.”
“네.”
훈의 눈빛이 궁금증으로 깊어졌다.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방금 그 문장으로는 도저히 추측이 안 되네요.”
미연은 아주 잠시 시선을 바닥에 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오늘만큼은 ‘설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입술을 열었다.
“커플 매니저예요.”
짧은 침묵이 스쳤다.
“사람을… 이어주는 직업이시군요.”
그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작은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네. 조건들을 듣고, 맞춰보고, 소개하죠.”
훈은 잔을 돌리다 순긴 멈칫했다.
“조건."
훈은 그 단어를 낮게 되뇌었다.
"사람들 사이의 인연에도, 사랑에도… 조건이 유효한가요?”
짧지만 묵직한 질문이었다.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결, 마치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을 가만히 두드려보는 듯한 어조였다.
미연은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라요.
어떤 이들에겐 조건이 안전망이죠. 상처를 덜 받으려는 장치.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그냥 핑계일 뿐이에요.”
“핑계요?”


18화. Wonderwall


“혹시… 예전에 뵌 적 있나요?”


낮게 울린 그의 목소리는 유리잔 가장자리에 잔향처럼 닿았다.

미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훈을 올려다봤다.

금테 안경 너머로 들어오는 그는 예상보다 훨씬 또렷한 인상이었다.

넓은 이마와 짙은 눈썹, 깊고 길게 떨어지는 눈매는 조명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시선을 마주하면 금세 삼켜질 것 같은 검은 눈동자였지만, 그 안엔 낯선 사람에게조차 묘한 안정감을 주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콧대는 매끄럽게 곧게 뻗어 있었고, 입술은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담백한 곡선이었는데—살짝 다문 채로도 결심과 온화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기운은 단순히 키와 체격에서 오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속 깊이 지켜온 태도, 흔들림 없는 중심에서 배어 나온 무게였다.

“글쎄요.”

그녀가 먼저 미소를 붙였다.

“그런 기시감이 드는 날인가 봐요.”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연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미연의 저 안 쪽, 무엇인가를 더듬고 있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둘 사이에 짧은 숨이 놓였다. 그는 바로 앉지 않고 다시 물었다.

“잠깐만 같이 앉아도 될까요? 방해가 된다 싶으면 금방 자리로 돌아갈게요.”

미연은 테이블 건너편 빈 의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이곳은 누구의 삶도, 누구의 요구도 듣지 않기 위해 찾아온 공간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태도, 거리를 지키려는 몸짓,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졌던 '비어 있던 한 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다시 빈 의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잔 마실 동안만.”


그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움직임은 크지 않았지만, 큰 키와 단단한 체형이 의자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바텐더가 램프를 아주 조금 틀자, 테이블 위로 둥근 빛이 퍼졌다.

훈은 손짓으로 위스키를 주문하며, 미소를 지었다.

“전 글렌리벳으로 시작했는데… 오늘은 맑게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미연도 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바텐더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 글렌드로낙, 오늘은요.” 미연이 대답했다. “오래 묵은 책장 냄새 같은 게 필요해서.”

둘의 목소리가 잔 위에 얇게 겹쳐졌다. 술의 향, 바의 온도,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누구 버전인지 같은 대화들이 가볍게 오갔다. 대화는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졌지만, 미연은 스스로 목소리를 평평하게 유지했다. 혼자 있으러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작은 경계였다.

훈이 물었다.

“늦은 밤 혼자 재즈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각자 이유가 있잖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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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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