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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16)

밤편지 - 챠우챠우(델리스파이스)

by 박경민


'조건.'
고객들이 가장 자주 꺼내는 단어이자, 동시에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말.
커플매니저에게 그것은 늘 출발점이었다. 학력, 직업, 외모, 성격... 조건들이 나란히 채워져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었고, 두 사람을 이어주는 안전한 절차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조건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일은 굴러가지 않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미연은 그러한 조건만으로 고객을 대하지 않았다. 사람을 이어주는 건, 조건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객이 제시한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그녀가 성공적으로 연결시킨 커플들을 떠올리면, 그 시작은 언제나 데이터 밖에서 왔다.
태도, 말투, 마음의 온도, 웃을 때의 표정, 말 끝에 묻어나는 숨결 같은 것들.
그 미세한 결을 알아보는 순간, 조건들은 그저 배경으로 물러나고, 서로를 향한 감각이 일을 완성했다.


17화. 챠우챠우


훈은 책을 펼쳐 둔 채,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눈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책에 올려두었지만, 활자의 경계가 자꾸 흐려졌다.

조금 전, 그의 뒤를 스쳐 지나간 포니테일.

목선을 따라 떨어진 가느다란 그림자.

베이지 색 코트 위로 미끄러지던 머리카락의 잔물결.

고개를 들지 않았는데도, 그 짧은 흔들림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디서…’라는 질문이 반쯤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음은 과거로 끌려가려 하고, 눈은 현재의 문장을 붙잡으려 애썼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거나, 막아보려 하는데도 잊혀져버리는 기억들이 어딘가에서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훈은 문득, 이 기시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키며, 슬쩍 그녀의 테이블로 시선을 보냈다가 곧 책 위로 돌아왔다.

글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같은 문장이 아니었다.


미연은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뒤로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반짝이는 황금빛 위스키를 앞에 두고는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데 몰두했다.

낮의 미팅, 그 중간에 삐걱거린 한 문장, 그리고 불현듯 덮쳐온 오래된 기억.

잔을 입술에 대고 천천히 넘기며, 생각의 표면을 차분히 다듬었다.

'조건.'

고객들이 가장 자주 꺼내는 단어이자, 동시에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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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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