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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0&15)

인터미션 - My Foolish Heart

by 박경민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바의 문이 열렸다.
이번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문턱을 넘자마자 잠시 멈춰 서서 바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호두색 바 테이블을 따라, 끝자리에 앉은 남자의 뒤를 스치며 지나쳤다.
조명이 그녀의 어깨를 얇게 덮었다. 베이지색 코트의 결이 빛을 받아 잔잔하게 물결쳤고, 손에 든 가방의 금속 고리가 짧고 맑은 소리를 냈다.
바텐더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기가 바뀔 때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 말하지 않은 말들이 동시에 자리를 고쳐 앉는 그 기척.
그 순간, 첫 번째 손님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잠깐 멈췄다. 잔 속의 위스키가 얕게 일렁였고, 그는 시선을 책에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자는 가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가방을 옆에 내려두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텐더의 눈에도, 그녀의 시선이 벽과 선반을 천천히 훑는 모습이 들어왔다.
거칠게 마감된 콘크리트 벽에서는 재즈 앨범 커버에 시선이 머물렀고, 바텐더 뒤편에 선반에서는 진열된 위스키 병들에서 눈길이 멈췄다.
금테 안경 너머의 옆얼굴은 단정했지만, 하루의 피로가 가늘게 묻어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손을 들자 바텐더가 그녀에게 다가갔고 곧 위스키를 주문했다.
“글렌드로낙,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그녀는 주문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선반 위에 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텐더는 그런 병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손님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다시 잔을 굴렸다.
잔을 굴리는 속도가 아주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
곧 그의 시선은, 유리잔 속의 빛과 그녀의 옆얼굴 사이를 조용히 오갔다.
바텐더는 오늘 밤 조용한 이야기 하나가 바 천장에 맺힐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0화 ― 재즈 카페


‘Slow Bar – Sienna.’


시에나에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이야기가 잠시 쉬어가는 자리가 있을 뿐이다.


조용한 재즈의 선율이 연기처럼 번져 공간을 채운다.

낮은 조도의 노란 빛깔이 달빛처럼 테이블 위로 스며들고, 잔잔한 조명 아래 유리잔의 굴곡은 별빛처럼 반짝인다.

바 벽면을 따라 늘어선 술병들은 그 은은한 빛을 머금은 채로 숨을 고르며, 고요를 한 모금씩 숙성시킨다.

누군가는 그것을 ‘공기’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분위기’라고 부르겠지만, 시에나 바 안에서는 그것이 곧 ‘시간’이다. 바깥의 분주한 초침들은 문턱에서 멈추고, 이곳 안에서의 시간은 술잔 속에 가라앉거나 음악 속으로 천천히 녹아든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들어설 때는 낯선 얼굴을 한 이들도, 잔을 비우고 나갈 때는 부드러워진 표정을 짓는다.

마치 소중한 친구와 아주 오래도록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 사람처럼.


조명이 모든 걸 드러내지 않듯, 사람들도 여기서는 전부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은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오래 남게 되니까…

잔잔한 빛, 나무의 향, 잔 위에 맺힌 물방울의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아무 말 없이 감정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머문다.

천장에 낮게 걸린 전등 또한 침묵으로 이곳의 시간을 견뎌낸다. 그러나 자리를 지키는 이에게만은 따뜻한 빛을 숨기지 않는다.

그 빛 아래에서는 웃는 얼굴도, 울음을 삼킨 입술도 오래도록 침묵하며 머물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해야 할 말을 굳이 고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술이 대신 말을 건네주길 바라는 듯, 그저 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이야기가 소리 없이 시간 위에 쌓여갈 것이다.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잔을 비우고, 고백하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기서는 시간도, 그리고 마음도 위스키처럼 천천히 숙성된다.


바텐더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따를 뿐, 말은 섞지 않는다.

몇 해째 이곳을 지켜왔지만, 손님의 이야기에 대해 말은 얹어본 적은 없다.

대신 그들의 손 끝이 남기는 작은 흔적들을 읽는다.

술잔을 들어 올리는 속도, 다시 채워지길 바라는 손짓, 잔을 내려놓는 손끝의 무게.

그 작은 움직임들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첫 잔의 선택, 흔들리는 눈빛과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의 길이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쯤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테면 ‘언어 없는 대화자’다.

손님이 어떤 생각을 하며 바에 앉아있는지, 잔의 흔들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잔을 굴렸고, 누군가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또 누군가는 마지막 한 모금을 끝내지 못한 채 남겨두고 떠났다.

바텐더는 그 잔들을 기억한다.

웃음을 남긴 얼굴보다, 잔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마음이 더 오래 남았다.


며칠 전에도 그런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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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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