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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 No Distance Left To Run(Blur)

by 박경민


그리고 그렇게 타지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11월이 지나고 첫눈이 내리던 날.
그날은 시애틀의 겨울답지 않게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훈은 카페에 앉아 책을 펼치고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시애틀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햇빛이 살며시 비치자, 순간적으로 서울이 떠올랐다. E와 함께 앉았던 도서관, 그녀가 포스트잇에 적어 건네주던 짧은 문장들, 까만 운동장에서 가슴 떨리며 맞잡던 손과 한 겨울밤의 첫 키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이제 추억은,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기억이 아니라, 창 밖에 비치는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조금 이상했고, 조금은 편안하기도 했다.
훈은 이제 이 도시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후드티 위에 얇은 바람막이를 겹쳐 입고, 자주 내리는 비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회색빛 도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15화. No Distance Left To Run


2008년 8월의 마지막 주를 앞두고, 훈은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인터넷에서 보았던 장면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풍경은 생각보다 더 고요했다. 그 첫인상은 오래도록 훈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았다.

짐을 챙겨 공항 밖으로 나오자, 공기를 흐릿하게 적시는 잔잔한 보슬비가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의 비는 한국처럼 하늘로부터 주르륵 쏟아지며 모든 것을 씻어내는 빗줄기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내렸다.

어쩌면, 이 조용한 빗소리와 눅눅한 공기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훈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는 제격일런지도 몰랐다.

훈은 공항 근처의 작은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익숙지 않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미리 계약해 둔 쉐어하우스로 향했다. 그곳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단층 주택이었다. 단정한 외관과 마당을 둘러싼 키 큰 나무들, 얇은 벽과 공동 주방, 그리고 전기밥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짐을 푸는 동안 젖은 나무 냄새와 습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훈은 그 냄새만으로,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몸은 피곤했지만 시차는 좀처럼 맞춰지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졸음이 쏟아졌고 밤이 오면 도리어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두세 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고, 그럴 때면 E에 대한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와 함께 듣던 음악, 함께 걸었던 거리, 함께했던 순간들. 그리고 이별까지...

하지만 며칠 후 수업이 시작되자, 낮과 밤은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훈도 그 리듬에 맞춰 조금씩 이곳의 삶에 적응해 나갔다. 아침 일찍 등교 준비를 하고, 익숙지 않은 캠퍼스의 지도를 머릿속에 넣으며, 전공 수업의 단어와 억양을 붙잡느라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수업은 어려웠고, 영어는 여전히 벅찼지만, 그 벅참이 곧 하루를 채워주는 리듬이 되었다.

훈은 저녁마다 인근의 작은 어학원에도 다녔다.

각기 다른 국적과 억양을 가진 학생들이 한 교실에 모였다. 그곳에서 그는 ‘훈’이 아니라 ‘Hunny’로 불렸다. 그 별칭 때문인지, 어학원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유난히 따뜻한 표정과 말투를 보여주는 듯했다. 가끔은 그들과 맥주를 마시러 나갔고, 스페인 출신의 학생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서툰 농담과 어색한 발음들 사이로, 타지의 고독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훈은 한국을 묻는 질문에 최대한 짧게 대답하며, 사람들의 감정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타지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11월이 지나고 첫눈이 내리던 날이 찾아왔다.

그날은 시애틀의 겨울답지 않게 유난히 추웠다. 훈은 카페에 앉아 책을 펼치고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시애틀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햇빛이 살며시 비치자, 순간적으로 서울이 떠올랐다. E와 함께 앉았던 도서관, 그녀가 포스트잇에 적어 건네주던 짧은 문장들, 까만 운동장에서 가슴 떨리며 맞잡던 손과 한 겨울밤의 첫 키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이제 추억은,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기억이 아니라, 창 밖에 비치는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조금 이상했고, 조금은 편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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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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