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잔나비)
제대를 열흘쯤 앞둔 어느 날, 생활관 앞으로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받는 사람: 훈.
보내는 사람: E.
소포 상자를 열자, 훈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반지가 보였고, 그 옆에는 짧은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다.
편지지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손에 쥔 느낌은 무거웠고, 그 속에 담긴 문장은 짧았지만, 그의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훈은 편지를 읽고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넌 좋은 사람이고, 더 멋진 남자가 될 테지만, 네 곁이 아닌 곳에서 그걸 응원하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언젠가 네가 다시 웃게 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게 내가 아니라도 괜찮다'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훈은 그 문장들을 몇 번이나 되새겼지만,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문장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감정의 회로가 끊긴 사람처럼 아무 표정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허공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손끝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각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찬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연병장을 가로질러 매섭게 몰아친 칼바람이 유리창을 거칠게 두드렸다. 훈은 그 한기에 순간 몸을 움츠리며, 자기도 모르게 이를 살짝 물었다.
그러자, 몸이 먼저 울컥 반응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14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훈련소의 불이 꺼지고, 침상 위 천장이 어둠 속에 잠길 무렵이면 훈은 늘 E를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긴장된 분위기와 새로운 훈련들의 연속이었다. 고된 일과가 끝나고 침상에 누우면, 당연하게도 다정했던 E의 얼굴이 떠올랐다.
툭 치면 웃어주고, 가만히 바라보면 손을 잡아주던 사람.
처음 마주한 날의 따스했던 햇살, 도서관 앞에서 어깨를 맞대던 오후, 그녀가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수줍게 나눴던 눈빛과 음악.... 그 모든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그립게만 느껴졌다.
훈은 그럴 때마다 E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었어.”
“진짜, 그때는 몰랐는데... 너와 함께 있던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어.”
“지금 여기서 너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 애틋한 마음도 훈이 군대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조금씩 희미해졌다.
기상. 점호. 작업. 식사. 훈련. 운동. 야간 근무. 취침.
시간은 정확히 흘렀고, 몸과 마음은 그 흐름에 맞춰 규칙을 배워갔다. 같이 고생하는 전우들은 점점 친밀한 동료가 되었고, 하루의 피로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다 보면, E를 생각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훈은 시간이 더 지나, 군대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을 무렵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E에게 털어놓았을 고민도, 함께 웃으며 이야기했을 일상도, 이젠 조용히 삼키고 넘길 수 있었다. 조금은 덜 흔들리고, 덜 기대고, 덜 말하게 된 자신의 모습이 분명 ‘성장’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괜찮은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침묵과 고요 속에서 중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뿌듯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E에게도 더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연스레 편지를 쓰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따금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지만, “오늘은 별다르게 쓸 말이 없다”는 이유로 접은 종이가 계속해서 쌓여갔다. 그는 변함없이 E를 좋아했고, 그건 E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었다.
편지와 통화는 이어졌고, 휴가 때마다 만났다.
여전히 함께 웃고, 손을 잡고, 밥을 먹고, 가만히 숨결을 섞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반복되며, 제대일이 가까워져 왔다.
훈은 더 이상 매일같이 마음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자신의 미래를 세워나갔다.
그렇게 제대가 한 달 남짓 남았을 무렵, 훈은 점호를 마치고 E에게 전화를 걸었다.
삐걱대는 신호음 끝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잔잔했다.
“어, 나야. 오늘은 별일 없었고… 아, 저번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제대하고 바로 유학 준비해서 나가라고 하셔서, 그러겠다고 했어.”
"유학?... 내 생각은 안 물어보는 거야?”
E의 말투엔 놀람보다 묘한 정적이 묻어 있었다.
훈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널 놓고 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공백은 훈에게조차 낯설 만큼 길게 느껴졌다.
"...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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