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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12)

언젠가는 - 그대 춤을 추는 나무 같아요(카더가든)

by 박경민
작년 이맘때도 이 길을 걸었었다.
그때는 같은 거리, 같은 하늘 아래서도 모든 게 달랐다.
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고, E는 그런 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미소 짓곤 했다.
조금 서툴고 어색했지만, 서로에게 눈길이 닿는 순간마다 작은 설렘이 피어났던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E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 맑다.”
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년보다 낮아진 햇살이 은행잎 사이를 통과해 둘의 어깨를 가볍게 덮고 있었다.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가지들은 은행잎을 하나, 둘 떨구며 흔들거렸다.
마치 춤을 추는 모습 같았다.
“그러네. 걷기 좋은 날씨네.”
짧은 대답이었다.
E는 그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길 가장자리로 발을 옮겨 낙엽을 툭툭 밟았다.
몇 걸음 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아.”
“응?”
훈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 요즘도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
E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앞을 향해 서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엔 바람처럼 가벼운 떨림이 섞여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훈은 최대한 무심하지 않게, 하지만 어쩐지 방어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E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은 길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바람결에 머뭇거리며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훈은 그 말의 의미를 끝내 다 헤아리지 못했다.


13화. 그대 춤을 추는 나무 같아요


2007년 3월. 새로운 학기의 시작과 함께, 다시 봄이 왔다.

훈은 E와 거의 모든 전공과목을 함께 들었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동기나 선배들은 늘 부러움과 시기의 말을 섞어 말했다.

누군가는 “E가 널 왜? 너 어디가 좋은 걸까?”라며 놀라워했고, 또 누군가는 “야, 네가 E랑 사귀는 건 진짜 대박이야."라며 반쯤은 질투 어린 웃음을 지었다.

훈은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전까지는 오직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의식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는 거울 앞에 오래 머물렀고, 옷매무새를 다듬었으며, 대화 중에도 타인의 반응을 살폈다.

그 변화는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E도 훈의 변화를 느꼈다.

하지만, 훈이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는 것은 단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했다.

둘은 여전히 함께였다.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길을 걷었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훈에게 다정했다. 가끔은 직접 도시락을 싸 와 캠퍼스 벤치에 앉아 나눠 먹었고, 비 오는 날이면 빈 강의실에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나눠 낀 채 함께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훈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E는 옆에서 조용히 웃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 모든 시간이 소중했고, 훈의 환한 미소 하나로 하루가 다 괜찮아지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일상에 스며드는 법을 익혀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훈은 예전처럼 그녀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맞잡고 있는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말투도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의식’보다 ‘습관’이 조금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훈은 E를 보면 환하게 웃었다. E가 웃으면 더 크게 따라 웃었고, 기분이 좋을 땐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곳을 먼저 본 뒤에야, 뒤늦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곤 했다.

E는 가끔 그런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직접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훈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사랑이란 원래 이렇게 천천히 익숙해지는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변한 게 아니라, 어른스러워진 거라고.'

'더 이상 쉽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거라고.'

E는 마음속으로 되뇌며, 작은 거리감들을 조심스레 지워 나갔다.

훈의 미소가 언젠가 다시 자신을 향하길 바라면서.

마치 자신이 그의 모든 기쁨이었던, 그 웃음을 다시 마주하길 바라면서.


중간고사가 가까워오자, 둘은 도서관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책상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태도에는 분명한 온도 차가 있었다.

E에게는 훈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했다면, 훈은 시험 점수가 더 중요해 보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주영화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훈아. 우리 이제 영화제 계획을 좀 세워봐야 하지 않을까?"

E는 설레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지만, 훈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일단, 중간고사 끝나고 얘기하자.”

"그래... 공부해."

E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집중하고 있는 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며칠 뒤, 마지막 중간고사 시험이 끝난 늦은 오후, 둘은 아담한 분위기의 작은 브런치 카페에 마주 앉았다. 시험도 끝났고, 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날이었다. 그리고 마침 훈의 생일이기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나오자, E가 가방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꺼냈다.

"짜잔, 생일 축하해."

"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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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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