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지만
3. 사랑했지만
K는 그 후로도 한동안 그녀 곁을 맴돌았지만,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취직을 하면서 바빠졌고 자연스레 연락은 드물어졌다. 미연 역시 적극적이지 않았으므로 둘의 관계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희미해졌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미연은 ‘오늘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매일을 견디고 있었다.
일 자체는 괜찮았지만, 하루하루가 마치 정해진 패턴처럼 무한히 반복됐다. 기획안을 들고 광고주를 만나 웃는 얼굴로 피드백을 받고,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어김없이 상사의 지적을 들어야 했다. 회사는 늘 경쟁을 유도했고, 뒤처지지 말라는 압박은 일상의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출근·업무·퇴근이 복사되듯 이어지는 나날. 어떤 날은 하루가 통째로 투명하게 지나가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만은 아니었지만, 무뎌진 감각 속에서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잠깐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다. 소개, 업무 인연 혹은 스쳐 지나던 작은 용기 끝에서. 하지만 어떤 관계도 오래가지 못했다. 부족한 건 대개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었고, 그 현실은 더 큰 공허로 되돌아왔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음에도, 삶이 나아지거나 무엇 하나 해결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어디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점점 가슴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연말 무렵 정말 오랜만에 K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 잘 지내요?’
짧은 문장 하나에 그녀는 자신도 몰랐던 그리움이 조용히 번져오는 걸 느꼈다.
비워둔 줄 알았던 서랍에서 낯익은 종이 한 장이 다시 펼쳐지는 감각.
몇 번 망설인 끝에 “응, 오랜만이다.”라고 답장을 보냈고, 짧은 근황을 주고받는 사이, 둘은 오래된 리듬을 기억하듯 자연스럽게 만남을 약속했다. 그 밤, 주고받던 문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K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한 평일 저녁, 신촌의 작은 카페.
테이블 위에는 K가 미리 주문해 둔 따뜻한 라떼가 놓여 있었다. 신입사원을 막 벗어난 K는 전보다 훨씬 단정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편안한 공기가 흐르는 자리였다. 그는 여전히 느릿느릿 말했고, 컵을 드는 동작에도 서두름이 없었다. 회사 이야기, 최근 본 영화, 대학 시절의 사소한 기억들… 한창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미연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미국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말끝에는 묘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K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미국?”
“응. 예전부터 생각은 있었는데... 잘 안 되더라. 유학도, 취직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연은 창밖의 어둠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치만… 여전히 그러고 싶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그건 그저 ‘희망’이었다.
"그러면 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꿈. 그리고 요즘 들어 그녀의 마음속에 자주 고이는 공허와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그 이야기를 K 앞에서 꺼내고 싶었다.
어쩌면 아주 은밀하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걸 증명해 보이길.
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요즘 외국계로 이직 알아보고 있었어요.”
미연은 놀라서 그를 보았고, K는 시선을 테이블에 둔 채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지금 회사도 나쁘진 않은데… 확신이랄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가 싶더라고요.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는 기분. 그래서 좀 더 넓은 곳에서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어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사이, 공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말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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