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건 딱 질색이니까(4)

San Francisco

by 박경민

4. San Francisco


K는 그날 이후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퇴근 후, 주말, 공휴일 등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미국에 가는 일’에 쏟았다. 영어 학원에 등록해 언어를 익혔고, 해외 취업 포럼에 나가 정보를 모았다. 비자 요건을 정리한 엑셀 파일을 만들어 미연에게 메일로 보내 오기도 했다.

가끔은 짧은 문자도 보냈다.

“요즘 이력서 수정 중이에요.”

“면접이 한 건 잡혔어요.”

“영어는… 아직도 자신 없네요.”

그 말들엔 자랑도, 압박도 없었다. 그저 다정하고, 꾸준한 사람의 문장이었다.

미연은 그 메시지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진짜 하려나 보다.’

처음엔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 어느새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꾸만 마음을 건드렸다. 대견했고, 고마웠다. 동시에 조금은 벅찼다. 그래서 그 모든 열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답장은 짧았다.

“오, 대단하네.”

“응, 잘됐으면 좋겠다.”

그 말들 속엔 기쁨도 있었지만, 불안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감정은 점점 복잡해졌다.

‘정말 날 위해서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자기가 원했던 길을 내 핑계로 걷고 있는 걸까?’

그 물음은 그의 진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불안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사랑을 증명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 걸까.

미연은 가끔, K의 메시지를 읽지도, 지우지도 못한 채 그냥 방치해 두곤 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그가 성공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던진 시험에 그가 통과하지 못하길. 그래야 죄책감도, 결단도 필요 없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희미해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가면 그만일 테니까.


하지만 몇 달 후, K는 미연 앞에 다시 나타났다.

“누나, 이번 주말에 시간 돼요?”

전과 같은 카페에서 K는 조용한 얼굴로 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돌아온 사람처럼.

“합격했어요. 산호세 IT 기업. 비자도 나왔어요.”

“이제, 누나 차례예요.”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이 먼저 밀려왔다.

“... 대단하다. 너.”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K는 잠시 미연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같이… 가 줄래요?”

그 물음은 다급하지도, 감정을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늘 그랬듯이.

미연은 순간적으로 기뻤다. 마음속에서 오래 바라왔던 일이 현실이 된 듯했으니까.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가슴 한가운데, 묵직한 감정이 또렷하게 내려앉았다. 이제는 그녀가 응답해야 할 차례였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더 이상 내 불안 뒤에 숨을 수 없겠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거잖아. 나는 이룰 수 없었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해주길 바랐던 거.’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 내건 시험의 결과를 받아들이듯 미국으로 향하는 여정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겠노라고.

반쯤은 책임감이었고, 반쯤은 언젠가 진심이 따라오길 바라는 희망이었다.

그렇게 스물여덟의 겨울, 미연은 K와 함께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초반의 미국 생활은 말 그대로 꿈같았다.

작은 아파트였지만 둘만의 공간이 있었고, 거리의 풍경은 새로웠으며, K는 모든 것을 함께 하려 노력했다. 주말이면 근교 도시를 여행하거나, 시장에서 장을 보며 낯선 언어 속에서 둘만의 세계를 쌓아갔다. 미연도 K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손을 먼저 잡았고, 저녁마다 테이블 위에 작은 꽃을 올려놓았으며, 생전 처음 요리를 배우고, 손편지를 써 봤다. 그녀는 자신 안에 남아 있던 거리감을 지우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법’을 익히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설렘은 10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언어는 여전히 불편했고, 친구를 사귀는 일도 쉽지 않았다.

K는 점점 더 바빠졌고, 그녀의 하루엔 고요한 시간이 늘어났다.

미연은 조금씩 지쳐 갔다. 그리고 마음속에 다시 싹튼 외로움과 불안을 스스로 해결해내지 못했다.

대신,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증명받는 방식’으로 견디려 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걸 보여 줘.’

그래서 그녀는 요구했고, 또 요구했다.

증명받지 못하면 불안했고, 불안은 다시 요구로 이어졌다.

“우리… 더 넓은 데로 이사 가면 안 돼?”

“왜 이렇게 늦게 와? 나 하루 종일 혼자였어.”

“내 생각은 해? 정말, 나 사랑하는 거 맞아?”

그녀는 사랑을 말로, 행동으로, 존재로 증명하라고 말했다.

K는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노력은 점점 무기력해졌다.

그러다 퇴근이 늦은 어느 밤이었다.

“또 이렇게 늦게 와?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해?”

K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 좀 그만하면 안 돼? 나도 하루 종일 일했어.”

“뭘 그만해? 난 오늘 하루 종일 혼자였어.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봤어?”

그 말이 끝나자, 둘 사이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미연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고, K도 마침내 쌓여 있던 감정을 드러냈다.

“난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뭘 해도 부족한 것 같아. 뭘 말해도, 뭘 선택해도… 항상 너 눈치부터 봐야 하고.”

그리고 마침내,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이 집에 왜 있는 것 같아?”

“사랑받아서가 아니야. 그 사랑을 계속 증명해야 살아남을 것 같아.

무슨 시험이라도 치르듯이, 또 뭘 해야 네가 고개 끄덕일까 고민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해?”

그의 말은 흩날리면서도 정확했다.

“그게 사랑이야?”

오래 쌓인 피로와 상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시험? 지금 내가 널 시험한다고 생각해?”

미연은 본능적으로 반문했지만, 그 말이 입술을 떠난 직후 마음 어딘가가 서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럼 뭐야, 이건? 뭘 해도 부족하고, 뭘 선택해도 너 눈치부터 봐야 하는 나는... 뭐가 되냐고?”

그 말이 그녀의 귀에 닿는 순간, 오래전 그에게 건넸던 시험지들이 하나씩 구겨져 사라지는 듯했다.

오래도록 품고 있던 오만과 두려움이 그 종이와 함께 사그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둘은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다음 주말, K는 조용히 말했다.

“나, 계속 시험받는 기분이야. 계속 뭔가를 해내야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그 말은 오래전, 그가 토익 성적표를 내밀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연은 한 번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결국, 일 년을 채우지 못한 채 미연은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그 말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사귀처럼 조용했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그녀의 가슴속에 남았다.

다정하고 담담한 이별이 이렇게 아릴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처음 알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미연은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흐릿한 구름 너머로 저무는 석양이 기체 옆으로 미끄러질 때, 그녀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되물었다.

‘내가 사랑을 몰랐던 걸까?’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시험했던 걸까?’

그 물음은 그날 이후에도 오래도록 그녀 안에 머물렀다.

그러다 몇 달 뒤, 우연처럼 찾아온 계기로 미연은 결혼정보회사에 발을 들였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사랑을 늘 조건과 자격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녀에게 꼭 맞는 필연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녀는, 사랑을 수치와 항목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오래된 기억과 물음을 조금씩 덮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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