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건 딱 질색이니까(완)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by 박경민


5.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창밖으로 점심을 마친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겹이 흘렀다. 누군가는 테이크아웃 커피와 구겨진 영수증을 쥔 채로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웃음을 나눴다. 하지만 미연의 시선은 창밖이 아니라 자신의 손등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부턴가 햇살이 그녀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느껴졌던 햇살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방금 전 마음을 휘저었던 기억은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마지막 김처럼, 온기와 함께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었고, 향은 희미했다.

맞은편 남자는 말없이 아메리카노 잔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저보다 자격이 낮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 말은 오래전, K가 남기고 떠난 말과 너무 닮아 있었다.

찻잔을 돌리던 미연의 손끝이 잠깐 떨렸다.

아주 작고 오래된 감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두 시 조금 넘은 시각.

미연은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컴퓨터를 켰다.

이번 주 소개팅 피드백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간단한 첫인상부터 세세한 차림새, 사소한 호감과 사소하지 않은 불편까지.

“잘 웃는 분이었고 대화도 편했어요. 근데 너무 조용하셔서 저만 말한 느낌.”

“첫인상은 괜찮았는데 대화 주제가 안 맞았어요. 저한테 관심이 없는 느낌이랄까…”

모니터 속에는 자신의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한 기준을 세우고 상대를 가늠하는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문장을 옮길수록, 마음 한쪽이 묘하게 저려왔다.

‘이런 조건들이 정말 사랑을 보장해 줄까?’

어느새 네 시.

이번엔 접수된 클레임 보고서를 열었다.

말끝마다 스펙을 강조했고, 질문은 없었고, 대화는 자기중심이었다는 지적.

상담 이력을 확인 후 요점을 리포트 양식에 옮겨 적다가 한 문장 앞에서 멈췄다.

‘좋은 분인 거 같아요. 그런데...’

그 ‘그런데’ 뒤로 덧붙여진 말들이 오래전 공항에서의 이별 장면을 불러왔다.

말없이 흐르던 공기. K는 캐리어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고, 느릿한 말투로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수고했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그는 끝까지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시험했던 걸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에게 던졌던 그 물음이, 낮에 들었던 한마디로 또렷해졌다.

“자격이 낮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말 속에는 상처가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던 시간, 그 시간을 견디다 지쳐버린 흔적.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연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나 사랑하는 거 맞아?”

미연은 눈을 감았다.

‘그때 K는 내 말에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그의 말과 행동으로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들이 그에겐 사랑을 위한 ‘조건’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조건이었을 것이다. 리포트 하단의 ‘관리자 코멘트’란으로 커서를 옮겼다. 잠시 멍하니 화면을 보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 회원은 누군가의 시간을 ‘시험’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커서는 문장 끝에서 멈췄고, 그녀는 천천히 그 문장을 지웠다.


저녁 일곱 시 무렵, 보고서를 마감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창밖은 이미 어둑했고, 팀원들 자리도 하나둘 비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랑을 한 걸까. 어떤 사랑을 원했던 걸까.’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럽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침 상담 전화, 점심 미팅, 예민한 클레임, 그리고 보고서.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에 남은 건 그런 종류의 일들이 아니라, 서늘하게 식어 버린 감정 하나였다.

화면 속 커서가 쉬지 않고 깜빡였다.

그 깜빡임이 마치 오래전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신호하듯 느껴졌다.

미연은 그 신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텀블러를 집어 들자, 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노트북의 팬이 돌아가며 책상 위에 작은 바람이 맴돌았다.

그 순간, 그녀는 뜨거운 것이 그리웠다.

피로와 공허, 잊혀진 기억과 후회를 잠시라도 씻어 줄, 한 모금의 위로 같은 무언가.

‘오늘은 독한 게 필요해.’

휴대폰을 열어 지도 앱을 켰다.

‘조용한 술집’, ‘혼술’, ‘위스키’.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곳,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공간이 필요했다.

미연은 적당한 곳을 고른 뒤, 코트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도심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바람은 낮보다 선선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단함을 안고 분주히 걸었고, 미연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 속을 천천히 걸었다. 큰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 즈음, K와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괜히 마음 쓰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었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아려왔다. 분명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그녀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늘 자신을 지켜주던 문장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 문장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가며, 오래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흩어졌다.


학동역 근처에서 다시 지도 앱을 켰다.

표시된 길을 따라 몇 분 걷자, 골목 안 작은 바가 보였다.

문틈 사이로 재즈가 은은히 새어 나왔다. <Fly Me to the Moon>

대학 시절 읽었던 책에서 누군가가 이 곡을 ‘궁극의 사랑 노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 말이 그땐 유치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아프게 들렸다.

‘Slow Bar - Sienna.’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그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조명은 낮고 테이블은 서너 개 남짓. 호두나무색 바 테이블에 잔을 올려 둔 남자 둘, 그리고 재즈와 바텐더의 조용한 움직임. 미연은 말없이 구석 자리로 가 자리를 잡았다.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오늘 하루가 정말 끝났음을 실감했다.

벽면의 거친 콘크리트 위로 오래된 재즈 앨범 커버들이 보였다. 바텐더 뒤 선반에는 위스키병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은은한 황금빛을 뿜어냈다. 몇몇은 마개에 먼지가 쌓이고 라벨이 빛에 닳아 있었다. 그 병들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자기 이야기를 속으로 곱씹는 오래된 책들 같았다.

메뉴를 훑었다.

‘발베니 더블우드’, ‘라가불린 16’… 그리고 ‘글렌드로낙 12년’.

묵직하고 달콤하며 오래된 서재 같은 향이 났던 술. 미연은 오늘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위스키라고 생각했다. 바텐더를 불렀다.

“글렌드로낙,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그녀는 다시 선반을 바라보았다. 묵직한 병들이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술처럼, 오래된 감정도 그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오늘 밤,

미연은 기억 속에 접어 두었던 오래된 페이지 하나를 펼쳐 보기로 했다.

언젠가 더 나은 방식으로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삐뚤어진 문장을 다시 읽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건넸던 시험지를 떠올리며 “미안했다” 말할 준비를 했다.


끝.




이 단편은 <if 말고 while>에서 if에 해당하는 미연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수정한 버젼입니다.

while에 해당하는 훈의 이야기와 미연과 훈의 만남은 <if 말고 while>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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