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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18)

밤편지 - Yumeji’s Theme(화양연화)

by 박경민


훈은 잔을 내려놓은 채 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분명 지금까지 만나왔던 이들과는 다른 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선엔 그녀를 향한 묘한 물음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if인가요? 아니면 while인가요?’
그 시선 속에서, 미연은 과거의 기억이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의 눈빛에서 오랜 전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결국, 입술 끝에 맴돌던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늘 조건을 확인하려 했어요. 그의 시험 점수, 다니는 직장, 말투와 작은 행동까지….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도, 저는 늘 새로운 조건을 내밀며 상대에게 증명을 요구했죠.
끝없이 if문을 반복하듯.”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러니하죠. 전 매일 사람들을 이어주는 일을 하면서, 조건만으로는 오래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정작 전 조건으로만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으니…”
그녀는 잠시 잔을 굴리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눈동자가 멀어지듯 흔들리자, 훈은 묻지 않고 기다렸다.


19화. Yumeji’s Theme


“그 if문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훈은 미연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조심스레 묻는 그 목소리 속에는,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던 질문이 섞여 있는 듯했다.

훈은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위스키의 황금빛이 흔들리며 잔 표면을 따라 미묘한 곡선을 그렸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단순한 비유를 넘어, 두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 닿게 되리란 걸, 훈은 아직 알지 못했다.

“if문은 단순해요.”

훈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조건이 맞으면 사랑하고, 맞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겠다는 식이죠.

조건이 맞는 순간에는 분명 진짜지만,

한 번 지나가면… 메모리에서 사라져요.

어디에도 남지 않죠.”

그는 잔에 시선을 두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조건을 만들죠.

‘먼저 연락해 주면 웃어줄게.’’

‘이번엔 더 확실히 표현해주면 사랑해줄게.’

끝도 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잠시 잔잔한 공기가 흘렀다.

미연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if문은 순간의 판단일 뿐이군요.”

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한 번의 참과 거짓.

하지만 사랑이 그런 식으로만 작동한다면,

아마 계속해서 새로운 증명을 찾아 헤맬 거예요.”

미연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잔속 위스키가 흔들리며 은은한 향이 번졌다.

그녀의 눈빛에는, 방금 들은 말이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미연은 잔을 입술에 대었다가, 위스키 향을 따라 흘러드는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확실히, 모든 조건이 맞는다 해서 만남이 수월하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어요. 전 매일 누군가의 조건을 맞추고 조합하는 일을 하지만…”

그 말을 하며 미연은 문득, 오늘 지점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적인 접근은 줄이세요.’

그리고 그동안 지켜봐 왔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렸다. 아침에는 지점장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그 말이 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 정작 오래 이어지는 인연은 그 틀 바깥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숫자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 같은 것들.

불쑥 스며드는 숨결, 사소한 버릇에 깃든 온기, 말없이도 전해지는 결심.

어쩌면… 사랑은 늘 조건 바깥에서 움직이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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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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