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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19)

밤편지 - Tonight,Tonight(Smashing Pumpkins)

by 박경민
훈은 잠시 잔을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미연을 바라보았다.
잔 위로 흔들리는 조명과 그 너머로 마주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문득, E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순간, 과거의 장면들이 지금 이 자리로 밀려 들어와, 그의 마음이 과거에 있는 것인지 현재에 있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훈은 E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송내역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자신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던 그녀의 목소리.
도서관 책상 위에 내려놓고 간 짧은 쪽지와 “우리 공연 보러 갈래?”라고 쓰여 있던 글씨.
홍대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아주던 따뜻함.
겨울밤, 목도리를 살짝 당기며 다가왔던 첫 키스의 떨림.
그리고, 불 꺼진 방 안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라고 말해주던 순간까지.
그 모든 건 늘 그녀가 먼저였다.
E는 언제나 먼저 다가와 주었고, 문을 열어주었고, 믿음을 내어주었다.

훈은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의 중심을 옮기는 용기, 그것은 그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선택이었다.
쓰디쓴 열이 목을 타고 가슴에 닿자, 지금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E의 마음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미연의 고백 속에서 그는 오래전 E의 마음을 보았다.
'그녀는 날마다 나와 함께하기 위한 선택들을 반복해 왔던 것일까...'


20화. Tonight, Tonight


“술이 취했나 봐요. 별 이야기를 다 하네요.”

미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웃었다.

방금까지 쏟아낸 말들이 생각보다 길고 무거웠다는 걸, 본인도 조금은 민망하게 느낀 듯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잔잔히 가라앉았다.


훈은 그녀의 웃음에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잔을 굴리며, 미연의 말이 남긴 단어들을 곱씹었다.

조건, 증명 그리고 미국.

그 단어들이 독한 위스키처럼 훈의 가슴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녀의 고백은 그저 취한 김에 흘러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외면받던 무게가, 술의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온 듯했다.

잠시동안 침묵이 스쳤다.

그리고 그 침묵이 오래 남을까 봐, 훈이 낮게 말을 꺼냈다.

"저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 같아요."

잠시 말끝이 허공에 맺혔다.

그는 잔을 돌리다 멈추고,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미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훈은 미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온전히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국에서의 모든 걸 내려놓고, 낯선 나라로 가는 선택… 저는 감히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끝까지 나를 먼저 생각했겠죠. 내 자리, 내 미래, 내가 잃게 될 것들... 그런 것들을 따지다가 결국 발을 빼버렸을 거예요.”

훈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향한 동경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함께 묻어났다.

그는 시선을 잔으로 내리며,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전 늘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는 쪽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한 번도 온 힘을 다해 붙잡아 본 적이 없었네요."

훈은 한동안 잔 속의 빛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다시 미연을 바라보았다.

조명 넘어 마주 앉은 그녀의 얼굴에 문득 E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순간, 과거의 장면들이 천천히 이 자리로 밀려 들어왔다. 훈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과거에 있는 것인지 현재에 있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E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송내역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자신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던 그녀의 목소리.

도서관 책상 위에 내려놓고 간 짧은 쪽지와 '우리 공연 보러 갈래?'라고 쓰여 있던 동그란 글씨.

홍대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아주던 손끝의 온기.

겨울밤, 목도리를 살짝 당기며 다가왔던 그녀의 숨결.

그리고, 불 꺼진 방 안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라고 말해주던 얼굴까지.

그 모든 건 늘 그녀가 먼저였다.

E는 언제나 먼저 다가와 주었고, 문을 열어주었고, 믿음을 내어주었다.

훈은 그 모든 시작이, 언제나 그녀의 용기였음을 이제야 알았다.


훈은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의 중심을 옮기는 용기, 그것은 그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선택이었다.

쓰디쓴 열이 목을 타고 가슴에 닿자, 지금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E의 마음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미연의 고백 속에서 그는 오래전 E의 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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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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