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편지(아이유)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미연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만약 while문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경우는 어쩌죠? 언젠가 사람이 변하거나, 마음이 변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로그래밍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조건이 참이라면 루프는 끝없이 돌죠."
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럴 땐 break문을 쓰면 돼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게."
그 말은 입술을 떠나자마자, 짧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리고 훈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어쩌면 이제 저도 스스로 빠져나와야만 할 것 같네요.
텅 비어있는 while문을 반복하면서, 다른 이들의 마음에 기대어 순간들을 버텨왔으니까...
이제는 break를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미연이 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깊은 고독과, 오래 담아 두었던 무언가를 내려놓으려는 듯한 작은 결심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21화. 밤편지
미연은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놀라 눈을 떴다.
눈앞에 훈의 실루엣이 보이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곧, 풍경이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자신이 아직 시에나 바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도의 마음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공간,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곳.
노란빛 전등은 한결 무거워진 숨결로 잔 위에 여린 금빛을 남겼다.
잔잔한 재즈는 곡의 끝자락으로 접어들며, 낮고 느린 리듬으로 공기 속에 번져갔다.
바 뒤편에 서 있는 바텐더의 모습은 흐릿하여, 마치 오래전 기억 속에 남아있던 그림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눈을 떴다. 심장은 아직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주변은 고요했다.
눈앞에는 훈이 잔을 손끝으로 굴리며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지만, 마치 조금 전까지의 침묵과 상상을 그대로 들킨 듯한 착각이 미연을 덮쳤다.
속옷 안쪽에 남은 미열이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방금 전 머릿속을 채웠던 관능적인 장면들이 혹시나 눈빛이나 표정으로 새어 나와 그에게 전해지는 건 아닐까—그런 두려움에 온몸에 작은 소름이 돋았다.
잔을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미연은 황급히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 마치 자신이 방금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상상했는지 들킬까 두려운 듯, 시선을 바닥으로만 떨구었다.
“저… 이제 가볼게요.”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보다 급했고, 목소리에는 감추지 못한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
훈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잘못을 했던 걸까, 조금 전 자신이 했던 고백이 그녀를 불편하게 한 건 아닐까, 아니면—‘받기만 했다’는 말이 그녀를 상처 입힌 건 아닐까—수많은 물음이 짧은 순간 훈의 눈빛에 겹쳐졌다.
하지만 미연은 그 눈빛을 마주하지 않았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며, 잔 옆에 놓인 코트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바의 공기는 여전히 느리고 고요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에는 급한 숨결이 섞여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럼 같이 나가시죠."
훈도 급하게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미연이 손을 살짝 들어 그를 멈춰 세웠다.
"아... 그럼 저 먼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목소리를 최대한 담담하게 내뱉으려 했지만, 끝자락엔 여전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코트를 품에 안고, 서둘러 바 구석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자리엔 두 개의 위스키 잔과 미처 사라지지 않은 두 사람의 온기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미연이 조금은 차분해진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급히 달아올랐던 기색은 최대한 숨겼지만, 여전히 시선은 훈을 향하지 못했다.
훈은 먼저 앞장서며 바의 문을 열어주었고, 훈의 앞을 지나 문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열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란 조명의 온기와 잔잔한 재즈의 잔향이 뒤로 물러났다. 문을 나서는 순간, 서늘하게 식은 밤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거리엔 이미 늦은 밤의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이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시에나 바는 다시 고요 속으로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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