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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驛)사에서

경계에서

by 박경민


전절에서 내린 후 환승하기 위해 계단 앞에 섰다.

밑에서 올라다 본 계단은 까마득했다. 하지만 집으로 가려면, 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지금이 무슨 역인지도, 환승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집에 가려면 다른 사람들을 따라 계단을 올라야만 할 것 같았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삼백 계단쯤 될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숨이 가빠졌다.

'아니 요즘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도 있나?'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내린 자리가 운이 없었던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삼백 개의 계단이 아니라, 편하게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는 방향도 있지 않았을까.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숨이 막힐 뿐이었다.


한 중간쯤 되었을까?

내 옆으로 허름한 차림의 배 나온 아저씨가 뒤뚱거리며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노숙자처럼 보였고, 위아래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다 터진 장갑에서는 열기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남자의 허우적거리는 손끝에 닿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이건 내가 친절하냐, 불친절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나는 본능적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힘들어하는 아저씨를 피해 계단을 올라 그 아저씨 앞에 섰을 때, 본능이 지나고 이성과 감정이 몰려왔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좀 도와드려야 하나?'

사람들은 바삐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왠지 전철을 타기에 늦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꽤나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인 나는, 슬쩍 아저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며 도움을 줄 정도의 친절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그 옆에 서서 '힘드시면 제 팔을 잡으라'는 느낌으로 오른팔을 내어줬다. 그 아저씨는 나를 보았는지 어쩠는지, 여전히 힘겹게 그리고 느릿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아저씨 옆에 서서 그 아저씨가 계단을 오르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는 내 도움의 손길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계단 한쪽의 난간을 가끔 잡을 뿐 여전히 느릿하게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답답함이 올라왔다.

'이러다가 전철 시간에 늦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아저씨는 휘청거리더니 쓰러지지 않으려고 내 오른팔을 한번 잡았다.

다시 균형을 잡은 그 아저씨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시 천천히,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숨을 헉헉 내쉬며 한 계단, 한 계단을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옆에 서서 가끔 오른팔을 내어주며, 친절함인지 무심함인지 모를 마음으로 함께 계단을 올랐다.

시간은 느리게도 흘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숨이 답답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맞아?, 이렇게 계단이 많은데,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야 정상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계단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나는 커다란 숨이 쉬어지며 답답했던 가슴이 한 순간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나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나는 어느새 플랫폼 끝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역사의 범위 밖에 서있다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전철을 타려면 플랫폼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이제 전철을 기다리는 승객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전철을 점검하고, 플랫폼을 청소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운행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철 한대가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지나가긴 했지만, 내가 지켜보고 있던 역에서는 서지 않았다.


역사 안에 있던 불은 이제 모두 꺼졌다.

일하는 사람들은 깜깜해진 역사 안에서, 손전등을 켠 채로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전철이 끊겼으니, 밖으로 나가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역사 안이 어두웠으므로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쉽게 들지 않았다.

'저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오늘 전철이 끊긴 거 같은데, 어찌하면 좋을지 물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전등 불빛들도 꺼지고 역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까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아저씨는 집에 가셨을까?

그래도 나름 착한 일을 한 것 같긴 하다.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지만...

비록 소극적이었지만, 힘들면 팔을 잡으시라고 오른팔을 내어줬으니,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분명 어제, 미금역에서 탄 전철이 죽전인가 어딘가에서 더 이상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모두 내리라고 했었다.

그리고 다음에 들어오는 전철도 반대편에서 운행이 끝났다며 승객들을 다 내리라고 했었다.

한참을 기다려 새로 들어오는 전철을 탔고, 망포역에서 내린 뒤 운 좋게 집 앞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나는 취한 상태에서도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버렸으며, 아직 자고 있지 않던 아이들과 인사하고는 자리에 누웠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보고 있었던 역이 어딘가 묘하다고.

분명 사람들은 급하게 계단을 올랐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도 계단을 오를 때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고, 배 나온 뚱뚱한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은 저승으로 넘어가는 역이었던 걸까?'

'나는 지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걸까?'

조금 전, 계단을 다 올랐을 때 내쉬어지던 숨이 떠올랐다.

나는 실제로 숨을 쉬지 못하다가, 그 순간 숨을 몰아쉬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며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 것도 잠자고 있던 현실의 내 호흡이었던 것이고, 계단을 오르는 내내 갑갑했던 가슴도 현실의 내 가슴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죽었을 수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느릿느릿 계단을 오르던 그 뚱뚱한 아저씨는 누구였을까?

내가 걸음을 늦추고, 그 아저씨를 소극적으로라도 돕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순간의 선택이 나를 살린 것일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등 밑에서 올라오는 전기장판의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열기 때문에 더웠는지 온몸에 땀이 나 있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지만,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였다.

불을 켜자 백색 등이 욕실의 하얀 타일에 쏟아지며 눈이 부셔왔다.

왠지 차가운 물을 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하는 내내 '내가 조금 전에 정말 죽었을 수도 있었던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따뜻한 물줄기가 닿는 느낌,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을 때 밀려오는 생명감이 새삼스레 감사했다.

그리고 꿈에서 내가 도왔다고 생각했던 그 아저씨가, 실제로는 나를 살렸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누구였을까?

신? 혹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아니면 조상님?

그럼 나는 왜 살아난 걸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지.


며칠 전에 욕심이 하나 생겼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생겨난 하나의 욕심.

그건 내 자식들의 자식들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진정한 사랑을 내어주고 싶다는 것.

내 자식들에게는 온전히 전해주지 못했던 그 사랑을 손주들에게는 제대로 전해주고 싶다는 소망.

소연이와 건우가 꼬맹이일 때는 왜 그렇게 삶이 어렵고, 힘들고, 버겁고, 고단했는지...

자식의 자식들에게는 한결 간단해진 삶을 살면서 젊었을 적 어렵고, 힘들고, 버겁고, 고단했기에 주지 못했던 것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을 보며 어렵고, 힘들고, 버겁고, 고단했던 그때의 나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줄 것이다.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했기에, 신이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허락해 준 걸까.

만약 내가 힘겨워하던 아저씨를 돕지 않았다면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컴퓨터 앞에 앉아 방금 꿈꾸었던 일을 적어야겠다고.

지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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