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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부자 Dec 30. 2024

<일상> 24년 끝자락 일요일의 고민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내 궁금증을 생각했다. 

어제 이 책을 읽고 간단한 서평을 작성해 발행을 하고 나서도 무언가 내 속에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서평에 작성했듯 독자들의 생각에 맞겨둔 두 주인공들의 대화에서 과연 나만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물드는 생각은


"이 책이 정말 나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걸까?"

스스로 물어봤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도 어쩐지 깊은 질문들이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듯했다. 기다림, 무의미 속에서의 의미 찾기,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고찰. 


책을 덮으며, 나는 그 복잡함 속에서도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 책의 진짜 메시지는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해하지 못한 책이라기보다,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은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책의 내용을 다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책의 구성 자체가 연극 대본 형식으로 짜여 있어서 더 난해하게 느껴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글의 흐름이 일반적인 서사 구조와는 달리, 대사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그 자체로도 낯설고 익숙지 않았다. 책의 내용, 즉 연극의 대본은 노년의 두 사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커다란 나무 아래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하면서도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겉으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어딘가 궁금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자나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듯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고, 대신 그들의 대화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며 나를 혼란 속으로 이끌었다. 처음부터 관객(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 대본은, 마치 무언가를 해답으로 내놓으려는 대신 그 과정을 끊임없이 의문 속에 머물게 하려는 듯했다.

읽는 동안, 나는 두 주인공의 대화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그들의 말은 계속 겉돌고 흩어졌다. 그것이 바로 이 연극이 의도한 혼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처럼 말이다.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언제 올지도 모른다. 이 모호한 기다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두 인물은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든 노년이다. 그들의 몸짓과 대사, 피곤한 태도 속에는 긴 세월 동안 기다려온 흔적이 스며 있다. 마치 그들의 삶 자체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행위로 정의된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가끔씩 기다림의 이유를 잊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나무 아래로 돌아와 기다림을 반복한다. 이런 설정은 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고도"를 기다려 왔음을 암시한다. 기다림은 단순히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리고 과연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심과 지루함, 무의미 속에서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 모습은 기다림 자체가 인간의 삶을 은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투영한 두 인물의 모습은,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삶의 공허함과 희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는 “고도”라는 인물은 이 책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도 않으며 인물에 대한 묘사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노인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고도”는 누구 란 말인가?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읽는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묘미 또는 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두 주인공이 미지의 인물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세 명의 등장인물이 더 무대에 오른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포조, 그리고 그의 늙고 비참한 노예 럭키, 마지막으로 "고도"의 심부름꾼 소년이다. 이 세 인물은 겉보기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대사나 행동은 주인공들의 기다림을 방해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포조와 럭키의 관계는 어쩌면 기다림 속에서 인간이 겪어야 할 고통과 참아야 할 인내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포조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럭키를 잔인하게 부리며, 자신이 가진 권력과 우월감에 도취해 있다. 반면 럭키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억압받고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존재다. 그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는 그 고통을 항의하지도,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이 둘의 관계는 두 주인공이 "고도"를 기다리며 겪는 고통과 희망의 연속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포조처럼 자기중심적이거나, 럭키처럼 억압된 존재가 될 수 있다. 아니면 그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복잡한 모습일 수도 있다.

고도의 심부름꾼으로 등장하는 소년은 이야기에 또 다른 층위를 더한다. 그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고 말하며 사라지지만, 결국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써 소년의 등장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에게 내일이라는 약속은 희망을 유지할 이유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 기다림이 무한히 반복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세 인물의 등장은 단순히 기다림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미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기다림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 혼란, 그리고 억압을 표현한 장치일 수 있다. 포조와 럭키의 관계, 소년의 모호한 약속은 모두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소년은 어쩌면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익숙한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고도가 내일 올 것이다"라는 말만 전할 뿐, 그 약속에 대한 이유나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미룰 때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내일 하면 되지"라는 자기 위로처럼, 소년은 기다림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나 확신을 제공하지 않지만, 희미한 가능성을 던져주며 두 주인공을 계속 그 자리에 묶어둔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그 희미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기로 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갈등과 유사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다짐을 자주 하지만, 막상 그 첫발을 떼지 못한 채 "내일"로 미루고, 또다시 그 내일을 기다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그저 낭비하며 기다림 속에서 허비한다. 그들의 대화는 표면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 시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숨겨져 있다.

결국, 고도는 우리가 기다리며 바라보는 어떤 거대한 성취나 목적, 혹은 꿈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도는 우리가 "오늘" 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을 미루는 인간 내면의 나태함이나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비극적이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늘을 허비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도가 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로 삶을 소진했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고도"란 결국 우리가 그토록 원하지만 미루기만 하는 "시작"의 의미라는 통찰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한다. "내일부터 시작해야지." 아니면 "다음 주부터는 꼭 해야지." 그렇게 우리는 내일이라는 이름의 약속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확실한 일처럼 믿으며 하루를 넘긴다.

그러나 내일이 오면, 우리 머릿속에는 또 다른 소년이 찾아온다. 그 소년은 익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도는 내일 올 거야."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그래, 내일은 꼭 시작하자"고 다짐하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다. 그렇게 하루는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며 끝없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그 시작은 "내일"에 머무르고, 내일은 다시 다음 내일로 미뤄진다. 우리는 기다림의 무의미함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그것이 주는 작은 위안을 놓지 못한다. "내일"이라는 막연한 희망 속에 오늘을 허비하며, 그렇게 제자리만 맴도는 삶을 이어간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쉽게 "오늘"이라는 기회를 붙잡지 못한다. 우리는 늘 그 소년의 말을 듣고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만, 정작 우리의 행동은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삶은 결국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 "오늘"들로 이루어진다. 오늘을 의미 없이 보내고 내일을 기다리는 삶은 우리를 끝없이 제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대신, 우리가 오늘 당장 그 시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도"는 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으로 새로운 길을 내딛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베케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도대체 고도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저자는 이 책의 의미를 읽는 독자들의 선택에 맡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일은 기다리며”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이 의미를 저자의 의도대로 내가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지금 시작(출발)하지 않으면, 내일(고도)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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