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4일차의 기록
어머니께서 어제 전화로 김장속과 절인배추를 보내셨다고 하셨다. 이웃집 김장을 도와드리며 얻어오신 것이라며 맛이 우리 입맛과 맞지 않을까 걱정을 하셨고, 따로 조금은 우리 식으로 버무리기도 했다고 하셨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역시 김치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드리니 목소리 너머로 전해지는 작은 숨결 속에 걱정과 정성, 오래된 사랑이 섞여 있었다.
올해는 처음으로 우리가 김장을 하지 않기로 한 해다. 해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가족 행사였지만 이번만큼은 어머니도 우리도 잠시 멈춰 서기로 했다.
매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장봉도로 들어가 김장을 하던 그 여정은 고단했지만, 그 고단함조차 이제는 오래된 전통처럼 따뜻하게 떠오른다.
어머니 혼자 모든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수고와 내가 아직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몸이라는 현실이 올해 김장을 쉬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알 수 없는 작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감정을 조금 더 또렷하게 느꼈다.
어머니에게 김장은 노동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이었고, 세월을 살아온 증거였고,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들던 시간의 다리였다.
나는 그 다리를 올해 건너지 못했다. 그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오래 건드렸다.
딸에게도 약속이 없다면 오라고 연락을 했다.
김장김치를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였고, 김장 날짜가 잡히면 친구까지 데리고 인천까지 올라와 손을 거들던 아이였다.
그 시간들이 내겐 당연하게만 지나갔지만, 오늘은 그 당연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오래 이어온 것을 멈추는 일은 의외로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전통이라는 것이 왜 의미가 있는지 오늘 새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어온 것 자체가 마음의 기둥이었고, 그 기둥이 올해는 조금 흔들렸다. 더 아린 것은 그 이유가 결국 나의 건강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김장을 하지 않는 선택이 나를 위한 선택이었음에도 마음 끝에서는 씁쓸함과 아쉬움, 그리고 묘한 실망감까지 찾아왔다.
마트에서 보쌈고기를 사려고 준비하는데 막내가 여권사진을 찍으러 이마트에 간다며 집에 들어왔다. 마침 잘 됐다며 부탁을 했고, 먹고 싶은 만큼 사오라고 했더니 수육용 고기를 3kg이나 사왔다.
내가 직접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먹고 싶은 만큼 사오라고 한 건 나였기에 달리 할 말은 없었다.
통양파 두 개와 대파 두 줄을 넣고 매실액기스와 맛술을 조금 부었다.
커피가루와 된장을 한 숟가락 넣어 보쌈 고기를 삶았다.
김칫속과 절인배추를 보내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식탁을 차렸다. 배추 한 잎을 넓게 펼쳐 김칫속을 올려 돌돌 만 순간, 오래된 겨울의 풍경이 다시 손끝에 스며드는 듯했다.
오늘의 식탁은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에 빈자리가 느껴졌다. 네 명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으면서도 스치는 말들 속에는 올해 김장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숨겨져 있었다.
굴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절인배추가 조금 덜 절였다는 말, 우리 김치 맛과는 조금 다르다는 말.
그 말들은 불평이 아니라 매년 이어오던 일을 스스로 하지 못한 데서 오는 허전함이었다.
손을 얼리며 배추를 씻고 김칫속을 버무리며 함께 보내던 그 시간이 고단했어도 함께였기에 따뜻했던 순간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식탁의 풍성함이 오히려 그 빈자리를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식탁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감사였다.
올해만 잠시 멈춘 것이고 우리가 다시 김장하는 날이 오면 오늘의 이 허전함도 또 다른 추억으로 덮일 것이다.
몸이 회복되는 만큼 전통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작은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빛을 냈다. 오늘 나는 다시 한번 내가 멈춘 자리와 그 자리가 만든 빈틈을 바라보았다.
멈춘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다시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멈춤의 순간들이 결국 나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천천히 떠올렸다.
치료로 아무것도 삼킬 수 없던 날들, 체중이 빠지고 기운이 떨어지면서 마음까지 흔들리던 때, 숨조차 따갑게 느껴지던 밤들이 이젠 멀리 있는 풍경처럼 흐릿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멈춤이야말로 내가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는 출발점이었다.
걷지도 못하던 순간에서 걷게 되었고, 먹지도 못하던 순간에서 다시 맛을 느끼게 되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 속에서 글을 쓰는 지금의 나로 조금씩 돌아왔다.
내가 멈춘 자리에는 두려움과 무력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 여지를 붙잡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또렷하게 인정하게 된다.
멈춤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붙들었고, 그 자리에서 잠시 쉬어간 덕분에 지금의 나를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김장속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며 나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고마움을 느꼈다. 올해 우리는 김장을 하지 않았지만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쉬고 있을 뿐이고 내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 생각이 마음을 조금 덜 아프게 했다.
오늘의 기록은 그렇게 김치 냄새와 함께 남아 있다. 어머니의 손길과 아이들의 웃음이 겹쳐지고 나의 몸은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다.
나는 조금 더 천천히 걸어야 하지만 그 천천함 속에서도 다시 이어질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