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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의 공기는 오늘 유난히 선명했다. 밤새 머금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창문 틈을 통해 천천히 스며들며 몸의 안쪽까지 서늘하게 닿았다.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방 안의 공기와 달리 내 생각만은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어제보다 기침은 덜했지만 아직 목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건조함이 투병 이후의 시간을 여전히 기억해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고요한 순간에 책상 위에 펼쳐 둔 이기적 유전자의 한 문장이 오늘 새벽의 감각을 대신 정돈해주었다.

“어미는 특정 자식을 편애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자식을 동등하게 이타적으로 대할 것인가?.....


편애라는 말에는 그 어떠한 주관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으며, ‘할 것이다 또는 해야 한다’라는 말에도 윤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나는 어미를 하나의 기계로 취급한다.


이 기계의 내부에는 유전자가 들어앉아 있고 이 기계는 그 유전자의 사본을 퍼뜨릴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 249page




편애.

1. 여러 대상 가운데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에게 사랑이나 호의를 한쪽으로 기울여 베푸는 것


책 속에 서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편애를 감정의 영역에서 꺼내 자연선택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움직임 속에 올려놓는다.


부모의 편애는 감정 없이 그저 생존이라는 목적을 향해 계산되는 전략적 선택이며 이 말은 잔인한 듯 보이지만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했다.


나는 오랫동안 편애를 감정의 문제로만 생각해왔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일이고 그 감정의 무게에 따라 상처가 생기고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병 이후 내 몸이 내 몸을 대하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몸도 어느 부분은 과하게 보호하고 어느 부분은 무심하게 지나친다. 약해진 곳을 우선적으로 감싸고, 덜 위험한 부분은 후순위로 밀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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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편애라는 단어는 이미 내 몸 안에서 매일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다. 아프기 전 나는 이런 신호를 외면하곤 했다.


그러나 병을 겪은 뒤에는 몸이 보내는 아주 작은 불균형조차도 의미를 가진다.


목이 조금만 따끔해도, 한기가 몸을 스칠 때도, 몸은 먼저 나의 생존 가능성이 가장 흔들리는 곳부터 보호하라는 본능적 명령의 신호를 보낸다.


나는 그 명령을 편애의 시선으로 바라본 적은 없지만, 오늘 이 문장을 읽고 나니 그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한 편애였던 것 같다.


편애의 시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감정의 편애는 비난받지만 생존의 편애는 자연스럽다.


결국 이 차이는 감정과 전략의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략으로서의 편애는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더 오래 남을 가능성이 높은지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투병 이후 내가 일상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체력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주고, 불필요한 감정은 차갑게 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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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나를 향한 생존의 편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인간의 관계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편애는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보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고, 더 자주 연락하고, 더 따뜻한 마음을 기울이는 일도 결국 생존 전략의 일부일 수 있다.


내 삶을 안정시키고 지탱해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어떤 관계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어떤 관계는 조용히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어쩌면 그 모든 선택 뒤에는 감정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내적 편애, 즉 생존의 편애가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새벽에서야 조금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가지 감정의 문제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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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서의 편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덜 주는 마음은 죄책감이 되고

누군가에게 더 주는 마음은 부담이 된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한 쪽에 치우친 사랑의 감정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이 편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감정의 편애를 피하려고 너무 애쓰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편애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의미를 별도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감정의 편애와 생존으로서의 전략적인 편애는 결국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렇게 만약 편애라는 단어를 감정에서 떼어내고 전략으로 바라본다면 나 스스로를 덜 비난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를 선택하고 누군가를 선택하지 않는 일과 내 몸을 먼저 챙기고 내 마음을 먼저 돌보는 일 그리고 어떤 하루는 나를 우선에 두고 어떤 하루는 누군가를 우선에 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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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의 선택이 생존과 회복을 위해

필연적 편애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오늘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편애를 감정으로 보던 시선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삶을 지탱하기 위한 선택의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편애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를 살리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 사실을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깨달아온 셈이다.


나는 ‘편애’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편애는 사랑의 기울기가 아니라 생존 가능성의 기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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