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6일차의 기록
오늘은 특별한 사건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회복이라는 건 언제나 눈에 보이는 변화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정확히 드러난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고요했지만 중간중간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작은 일들로 채워진 하루였다.
후츄가 지언니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
집 안에서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먼지의 양이었다.
녀석이 있을 때는 매일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이틀에 한 번은 대형 청소기로 직접 밀고 걸레질까지 해야 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사라졌을 뿐인데 청소 루틴이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여유롭게 로봇청소기를 눌러놓고 책을 읽다가 거실로 나갔는데, 청소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래돼 리모컨도 잃어버린 상태라 결국 내가 직접 녀석을 찾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빠지지 않는 신기한 공식이 있다.
로봇청소기는 절대 찾기 쉬운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침대를 통째로 들어내고, 막내 방을 훑고, 마지막으로 소파 아래를 들여다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소파를 완전히 들어내며 방의 가장 구석진 곳을 뒤지다가 겨우 녀석을 발견했다. 그 위치를 보며 혼자 웃음이 나왔다.
마치 일부러 숨어 버린 것처럼 꼭 마지막까지 나를 번거롭게 만드는 성격은 여전했다.
로봇청소기를 충전기에 꽂아두고 소파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는데, 소파 아래에는 여전히 후츄의 흔적과 작게 쌓인 먼지가 남아 있었다.
‘이왕 한 김에 하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대형 청소기를 꺼냈다. 소파 주변을 청소하다 보니 어느새 범위는 식탁 아래로, 다시 거실 전체로 넓어졌다.
늘 그렇듯 청소란 시작한 만큼 끝을 봐야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다.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 구석 어딘가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충전이 끝났습니다.”
얄미운 녀석같으니라구....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방금까지 온 힘을 들여 집안을 청소해놨는데 뒤늦게 충전을 마친 녀석이 마치 나에게 ‘이제 시작하시죠’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순간 어이도 없었지만, 누구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결국 혼자 소파에서 실소가 터졌다.
결국 오늘의 청소는 욕실까지 이어지고, 오후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다. 자전거 위에서 흘리는 땀보다 더 많은 체력을 쓴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내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말끔해진 실내를 바라보며 은근한 뿌듯함이 올라와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졌다.
이런 작은 성취감이 요즘의 나에게는 꽤 큰 힘이 된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 앞에 섰을 때, 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꺼내려 했는지,
왜 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 사용한 체력이 많아서인지, 나이 탓인지, 투병 이후 생긴 습관 같은 ‘멍 때리기’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내 나이쯤 되면 이런 경험은 하겠지. 병하고는 관련 없는 자연스러운 순간일 수도 있겠지.”
예전 같으면 이런 멈춤이 불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한 번 멈추는 시간도 회복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 겁내지 않아도 되는 일.
단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눈에 띄는 장면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날이 더 깊은 의미를 남기는 때가 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정리하고, 웃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오늘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이었다.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결국 나를 다시 일상으로 데려오는 힘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