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Vs. 행복의 기원)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서양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하였고
중세 서양인들은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다윈은 종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이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실제로 생존을 목표를 살아가지 않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이미 멸종되어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대표적인 수단으로
음식과 타인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행복이란 단지 이 두가지와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 음식과 타인이 필요하고, 음식과 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행복이라는 깜빡이가 필요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였다.
맛있는 음식보다 좋은 경치만 봐도 행복한 종족은 일찌감치 굶어죽어서 생존경쟁에서 탈락하였을 것이다.
타인이 필요한 이유는 양떼에서 떨어져 나오면 늑대밥이 되듯이 무리를 이루지 않고 나 홀로 고립되면 생존할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 조상들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은 번식이다.
번식은 나의 무리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고 유전자를 통해서 삶을 지속시키는 생존욕구를 만족시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수 있게 있다.
나의 생명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자손을 통해서 나의 유전자를 1/2 물려줌으로써
영생의 꿈을 간접적으로 이룰수 있다.
그러면 일개미는 왜 이 본능적인 번식을 포기하고 형제개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할까?
그리고 번식도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데 왜 숫컷 공작새들은 화려한 깃털로 적들의 먹잇감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암컷에게 잘 보여서 번식을 하려고 하는 걸까?
동물은 부모에게서 1/2씩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자식에게도 1/2의 유전자를 물려준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와는 1/4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하지만 개미의 경우 숫개미는 정자 없는 여왕개미의 알에서 태어나므로 어미의 유전자만을 100% 받게 된다.
암개미는 여왕개미와 일개미로 나누어지고 어미,아비에게서 50%씩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자매개미의 경우 어미의 50%, 아비의 100% 유전자를 받으므로 75% 유전자를 공유한다.
그래서 50% 닮은 유전자를 가진 새끼를 낳는 번식을 포기하고 75% 닮은 유전자를 가진 자매와 조카 개미를 돌보는 일에 온 삶을 다 바치게 된다.
알만 낳는 여왕개미의 평균수명은 20-30년이고 평생 자매와 조카를 돌보는 일개미는 2-3년이다.
수개미는 여왕개미가 날아오를 때 함께 날아오르지만 교미에 성공한 수캐미는 배가 터져서 죽고 실패한 수개미는 모두 떨어져 죽거나 집밖으로 쫓겨나서 1~2주 안에 죽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 동물은 번식을 통한 유전자 운반의 역할만을 하지만 인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인류의 일부일처제는 남성들끼리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방적인 제도이다.
모든 동물의 숫컷들이 암컷과 짝짓기에 성공할 가능성은 5% 미만이라고 한다.
평범한 암컷도 숫컷을 선택만 하면 짝짓기에 성공하였지만 열심히 치장한 95%의 숫컷도
암컷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짝짓기를 할 수가 없었다.
좀더 높은 짝찟기 확률을 위해서 포유류와 과거 우리 조상들은 계급사회를 만들어서 서열별로 어느정도 짝짓기의 혜택을 볼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 못한 다수 숫컷들의 반란으로 일부일처제가 제도화되었다.
만약에 이런 합의된 제도가 없었다면 여성들은 모두 젊고 잘 생긴 원빈,현빈 같은 남성들에게 올인하게 되고 나와 같은 99% 대부분의 남성들은 결국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고 쓸쓸히 사라져야 할 운명이니 실로 다행스러운 제도가 아닐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적들에게 노출되어 생존에 위협을 받더라도 숫컷 공작새가 짝짓기에 성공하기 위해서 화려한 깃털로 치장하는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이유이다.
인간의 이타적인 행동은 유전자 셈법으로 종족을 위해 희생하는 일개미와는 기전이 조금 다르다.
인간이 자아실현과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행복의 깜빡이와 좀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행복의 충족 후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그 느낌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존에 불행의 깜빡이를 켜게 한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권태라는 위험한 스트레스를 줄이게 하는 행복의 기본 디폴트값을 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독서,명상,예술활동과 같은 자아실현이고 타인을 도와서 소속감을 강화시키게 하는 이타적인 행동이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그 이유는 이 두가지가 생존의 가능성을 가장 높이는 깜빡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조상과 달리 먹을 것 걱정이 사라지는 현대와 미래사회에도 이 두가지만으로 우리는 스트레스 없이 생존할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욕망 충족 전의 고통과 욕망 충족 후의 권태를 오고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앞으로 가장 필요한 행복의 깜빡이는 롤러코스터처럼 고통과 권태를 반복하는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권태로움을 잊게 해 주는 평상심과 행복의 디폴트값을 올려주는 독서와 명상, 이타적 행동과 같은 자아실현 욕구가 될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자아실현만이 파랑과 빨강을 반복하는 교통 신호등을 벗어나서 밤새 거리를 밝혀주는 안정적인 가로등 불빛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