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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feat. 박경리)

by 시 선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야 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482쪽 )


김약국의 다섯 딸들 중 그저 노처녀이기만 한 둘째 용빈의 고백이다. 박경리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한 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통영의 유지였던 한 가문의 몰락과 비극을 그려낸 작품이다.


'덜 설어야 눈물이 나지.'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375쪽 )


이 집안에 들이닥치는, 겹치고 겹치는 불운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사 점괘 나는 대로 말을 하요. 당신 집에서 잡귀가 우글구글하구마. 맞아 죽은 구신, 굶어 죽은 구신, 비상 묵은 구신, 물에 빠져 죽은 구신, 무당 구신, 모두 떳들었으니 집은 망하고 사람은 상하고 말리라."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342쪽 )


점쟁이의 말대로 잡귀들 때문인 걸까.

이 모든 것은 단지 피할 수 없는 김약국 집안의 운명이라는 말인가.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전에 도깨비 집이라 불렸던 김약국의 집을 둘러싼 소문과 저주는 소설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 지배적인 힘은 김약국이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어떤 삶에 대한 의지를 꺾고 운명에 굴복하면서 발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약국은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김약국을 키운 큰어머니 송 씨의 정신적 핍박으로 한때 멀리 떠나려 했으나 송 씨의 말에 따라 가문의 대를 잇고자 그곳에 눌러앉아 종신한다.


차라리 그때 그곳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면 어땠을까?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가난과 역경이 그를 덮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니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최소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과 세상사에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그는 부모의 불행한 죽음, 주변의 편견과 저주, 재정적 파산, 자녀들의 불행과 같은 숱한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의 처와 딸들의 삶이 황량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김약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처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김약국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도 다섯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였던 김약국의 딸들의 엄마, 한실댁.


"그는 딸을 기를 때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리같이 어여쁘니 으레 남들이 다 시중들 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99쪽 )


소설 초반부에 나오는 한실댁의 독백 장면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섯 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딸들을 바라보고 사랑하고자 하는 넓은 어머니의 모정이 독자인 나까지 흐뭇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용숙이 과부가 됨으로써 한실댁의 첫 꿈은 부서지고 말았다.


"맏딸이 잘 살아야 밑의 딸들이 잘 산다 카는데."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100쪽 )


한실댁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 시대는 이렇게 "~카더라"와 같은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따라 여자들의 인생이 떠넘겨지던 때였다. 여자들은 나이가 차면 집에서 정해주는 사람과의 결혼으로 치워버려야 할 대상이었고 그렇게 사랑도 없는 결혼을 강요받았다. 남자들은 밖에서 첩을 두어도 당당했으며 여자는 (남편이 죽었어도, 심지어 남편이 쓰레기 같았어도) 평생 그 남자만을 바라봐야 했다. 애초에 김약국의 어머니도 사주가 안 좋다는 편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강제로 헤어지고 김약국의 아버지와 혼인한 것이었다. 그런 편견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비상 같은 걸 먹을 일은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런 비극과 몰락이 이 집안의 운명이라면

이 운명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수 있을까?


그건 그 시대에 만연했던 운명론적 세계관과 불평등한 사회적 제도, 편견, 관습, 그 시대에 얽매인 전통적인 규율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진다.


첫째 용숙은 자유의지에 의한 재혼을 통해 새 삶을 구현하고 과부라는 열등감과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용빈은 다섯 딸 중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타고나기를 고귀하고 영민하였고, 관습에 따라 결혼하지 않고 신식교육을 받아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돈을 번다. 집안의 온갖 불운으로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지만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극복하고 개척해 나갈 것으로 전망한다.


셋째 용란은 이성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머슴인 한돌과 사랑을 나눈 사실이 들통나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떠밀리듯 아편쟁이에 성불구자인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 남편에게 폭력과 학대를 당하며 혹독한 댓가를 치르는 것처럼 산다. 사실 용란은 한 사람만을 사랑한 거였다. 그만큼 순수하였다. 한실댁이 몇 번이고 후회를 했듯 용란이 사랑했던 한돌이와 이어지면 될 것이었다. 한돌이 사생아나 머슴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교제는 아무 문제없을 것이었다. 사회적 차별과 편견 없이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해 주었다면 후에 그런 흉측한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용옥은 내가 보기에 가장 가여운 인물이다. 그 시대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든 선행을 실현하였음에도 애정 없는 결혼을 지속하고 인면수심을 지닌 시아버지의 겁탈을 피하려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용옥이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위한 삶을 우선할 수 있었다면, 그 불행한 결혼생활을 일찍이 끝낼 수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용혜는 기존의 통념대로라면 언니 용란을 뒷바라지하거나 적당한 혼처를 찾아 시집을 갔을 테지만 언니 용빈을 따라 학업을 계속 이어나감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갈 것으로 기대된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우리에게 운명과도 같은 낡은 사회적 제도와 편견과 관습에 따른 폐해를 낱낱이 고발한다. 철저히 경고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그렇기에 우리는 매 순간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해 나아갈 것을,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아갈 것을 권고한다.


더불어 그러한 용기를 가질 것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을.

용빈이 용혜를 데리고 통영을 떠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윤선의 출항이 용빈과 용혜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배는 서서히 부두에서 밀려 나갔다. 배 허리에서 하얀 물이 쏟아졌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49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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