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이 첫 문장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었어. 너한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소설로써 이 책은 꽤 재밌다는 거야. 사실 이 문장이 첫 문장은 아니야. 책은 크게 ‘나’라는 화자가 서술하는 서문과 후기,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요조가 쓴 세 개의 수기로 이뤄졌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는 고백은 바로 주인공 요조의 첫 문장인 셈이지.
서문은 이렇게 시작해.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사진 석 장을 나이순으로 묘사해. 유년 시절과 교복 입은 모습, 나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느 사나이의 모습을. 그런데 이 짧은 글이 어찌나 강렬하고 매혹적인지. 생전 읽어보지 못한 과감한 방식이야. 이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떤 인간일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미치도록 궁금하게 하는 거야. 왠지 아주 이상하고 기괴하고 기묘하거든. 그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다음 수기가 이어지면서 사진의 주인공이 직접 말하게 해. 그러니 이 책에 빠져 안 빠져? 그대로 빠져버리는 거야. 그 자리에서 풍덩.
그러다 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릴 때쯤 아마도 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어쩌다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망가졌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거지? 무엇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지? 이 물음에 이끌려 너는 책을 한 번 더 펼치게 될지도 몰라. 나처럼.
요조는 얼마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었어. 어릴 때부터 행운아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얼굴도 잘생긴 데다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요조가 말하길 학교에서 존경받을 뻔하기도 하거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구나 존경을 원할 텐데 요조는 존경이라도 받을까 봐 오히려 두려워했어. 요조는 그런 아이였어. 인간의 존경마저 무서운 약간은 별난 아이.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 저 혼자 인간과 다른 것 같아 매일 불안에 떨었던 아이.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21쪽)
요조는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자기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와 우울함은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오직 익살만이 살길이라 믿게 돼.
요조가 하는 모든 행동은 바로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돼.
그로 인한 선택들이 결국 그를 처절한 자기 파멸로 치닫게 하는 거지.
그렇다면 요조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이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요조는 어린 시절 각인된 것이 틀림없어.
스스로 자기 파멸의 길을 가도록 말이야.
요조는 수기에 어머니에 대해 아버지보다도 더 언급하지 않아. 아이는 태어나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고 존중받는 존재로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거든. 그 거울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그 힘은 평생 아이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거울의 역할은 대개 어머니 몫이야. 아이에게 어머니는 곧 세상이자 절대적인 존재이지. 내 생각에 요조의 어머니는 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 같아. 아팠거나 허영심 때문에 아이를 방치했을지도 모르지. 이 경우 어머니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그 거울 역할을 대신해 줘야 했을 텐데—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처럼 말이야—이 아이에겐 그런 존재가 없었던 거야. 방치된 이 아이는 불행히도 나쁜 하녀와 머슴에게 맡겨졌을 가능성이 커. 조롱하고 이용했을 거야.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그 어린 요조를 말이야. 그러니 지배당하기도 쉽지. 그리곤 남들 앞에서는 아이를 위하는 척 위선을 떨었겠지. 자아를 형성하지도 못한 채 아이의 각인된 세상은 그랬던 거야. 그 세상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위선으로 가득 찼겠지.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추악하고 천박하고 잔인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참았습니다. 그것으로 인간의 특질을 또 하나 알게 됐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힘없이 웃었습니다. 다만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그런 수단에 저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 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29쪽)
요조는 그렇게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으며 부모조차 믿지 못하는, 인간과 세상이 무서워 익살을 부리며 남들의 비위에 맞춰 자기가 없는 텅 빈 삶을 살아가게 돼. 그게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인 거지. 그 또한 남을 속인다는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자기 역시 자기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깨닫지 못하면서.
요조는 자기를 이끌 힘이 없던 거야. 그러니 상황에 따라 남들에게 철저히 휘둘려 살아. 이용되기도 해. 그럼에도 화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마저 자기를 먼저 질책해. 행복도 겁내. 사랑, 존경, 우정 그 모든 긍정적인 감정들을 부정하고 회피해 버려. 알지 못해. 본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거야.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후기에 요조의 수기를 건넨 술집 마담은 이렇게 술회해.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230쪽)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다룬다기보다는 자기를 잃은, 자기가 없는, 인간의 나약한 면을 조명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나약해진 인간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어떻게 자기를 스스로 파멸로 이끄는지, 파헤치고 들춰내는 것이지. 인간의 본성과 위선까지.
인간이 가장 나약한 순간은 더는 인간이지 못할 때야. 그리고 인간이 인간이지 못한 건 바로 자기를 잃었을 때인 거지. 그래서 난 요조의 생이 혐오스럽거나 부끄럽기보다는 안타깝고 안쓰러워 연민을 느껴. 적어도 요조는 순수했으니까. 순수만을 갈망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이 소설을 단순히 어느 인간 실격자의 자기변명쯤으로 해석한다는 건 아니야.
인간의 삶은 언제나 온전하지 않아. 누구나 상처를 받고 자기를 잃기도 하지.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삶에는 자기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어.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하냐에 달린 것이지.
요조 역시 마찬가지야. 한 번이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면, 원하지도 않던 고등학교에 억지로 가지 않았었다면, 혹은 미술 학교에 갈 수 있었다면, 자기 내면을 예사롭게 보여 왔던 친구를 곁에 둘 수 있었다면, 자기를 이용하기에 바빴던 호키리나 넙치를 차마 거절할 수 있었다면, 신뢰의 천재 요시코의 처녀성을 탐하지만 않았었다면, 아니 최후에 요시코의 불륜 장면을 목격했을 때 화라도 낼 수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스스로 인간 실격을 선고하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실격자 요조를 통한 인간의 자격에 관한 이야기야.
요조가 가장 무서워하는 화조차 인간의 본성이고 그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해.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 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 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109쪽)
또한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자기를 잃어서는 안 돼. 자기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감정 그 무엇이든 자신의 진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획득할 수 있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자기가 없거나 혹은 자기를 잃을 경우 자기를 되찾는 일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야. 그래도 인간이라면 절대 스스로 자기를 포기해서는 안 돼. 다른 도피처를 찾아 도망가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해. 그게 죽을 만큼 두렵더라도 말이야.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해. 그렇게 매 순간 노력하고 애쓰며 극복해 나아가는 거야. 그 과정이 곧 인간의 삶인 것이지.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이기도 하고.
너라면 어떨까? 어떤 순간에 요조가 자기를 구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