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일상
이번 달 들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날씨가 어쩌면 처음인 것 같다.
아침부터 하늘은 맑았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바람이 만만치 않으니 집안에 조용히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골프장을 안 간 지가 두 달이 넘은 것 같다.
골프 구력 8년 차 두 달 넘게 골프장에 안 가기는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오후가 되니 해님이 '나 왔어'라며 '그래도 집에만 있을 거야?' 하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일기예보를 여러 번 보고 몇 번을 망설이다 나왔다.
아무래도 올해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나와보니 정말이지 골프장이 열려 있는 게 맞나를 의심할 정도 사람이 없다.
3번 홀에 있을 때 반대쪽 13번 홀을 혼자 걷는 사람이 있다..
그날 골프장에서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다.
여전히 바람은 있었지만 오전의 강한 바람은 아니라 다행이다.
그린 위로는 올라갈 수 없어서 퍼트도 안 가지고 갔고 3개의 채만 어깨에 메고 가니 무겁지도 않고 좋다.
겨울의 우리 골프장은 트롤리를 끌고 다닐 수도 없고 그린도 막아놨다.
잔디에게도 쉬는 시간을 줘야 된다는 취지다.
덕분에 시즌에는 우리 골프장보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골프장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바닥이 너무 소프트해서 아이언으로 디봇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은데.. 젖어 있던 잔디라 치고 난 채에 저렇게 소복하니 올라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겨울 골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비주얼.. 여름이라면 어림도 없다.
저 멀리 날아가 있는 흙을 주워와 덮던지, 파인 자리에 잔디씨와 모레가 섞인 흙을 뿌리고 가야 한다.
겨울 그린이라 코스가 짧아서 9홀을 하는데 한 시간이면 끝난다.
평소에는 갈 일이 없는 길도 짧은 코스로 단장을 해놔서 걷는 기분이 새롭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49제로 한국에 갔고, 아이들은 궂은 날씨에 골프장에 따라나서질 않고..
함께면 함께라 혼자면 혼자라 좋다.
혼자서 행복해야 여럿이도 행복할 수 있다던데..
난 혼자서도 잘 놀으니 함께해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비도 안 오는데 집에만 있긴 아쉽다.
아이들과 동네 크리스마스 마켓에 나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 오면 주로 먹는 삼총사다..
초코를 딸기에 씌운 달달이와, 감자를 갈아 기름에 튀긴 Reibekuchen과 사과소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글뤼바인.
쾰른보다 가격이 싸다..
지역 발전을 위해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와 줘야 되는 동네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이런 게 원래 있었나?
손금을 봐주고 사주팔자를 봐주는 곳이다.
뭔가 신비스러워 보일만한 장식을 해놨다.
그래도 들어가 볼 마음은 안 든다..
올해 성과가 있어야 내년에도 나올 것 같은데 두고 볼 일이다.
구름이 걷힌 파란 하늘이어서인지 월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다.
방학을 한 학생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
삼삼오오 여유로우면서도 들뜬 표정은 보는 내 마음도 풍족하게 만든다.
"결핍이 만족을 낳아. 풍요가 만족을 낳는 것이 아니야' - 칼 융 레드북
나도 독일의 겨울 날씨를 겪어 보지 않았더라면 몇 시간 반짝 비추는 해를 이렇게 반가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할 결핍을 통해 느끼는 이 만족감.
이날 이후 다시 밝은 빛줄기는 침잠해 들어가 뼈까지 축축해지는 독일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해님은 구름 뒤에 있겠지..
난 네가 좋아.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