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일본의 지도를 펼쳐놓으면,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 전국대명들의 세력권이다. 갑주의 무인들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시대. 그러나 그 지도의 한켠, 기이반도 북서부의 작은 지역에는 어떤 대명에게도 속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사이카슈(雑賀衆)라 불린 이들은 15세기 무렵 역사에 등장하여, 응인의 난 이후 하타케야마 씨의 요청에 응해 근기지방 각지를 전전하며 차츰 용병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주군을 섬기지 않았고, 영지를 넓히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유로웠다.
사이카슈의 본거지는 현재의 와카야마시 및 가이난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사이카 장(雑賀荘), 십개향(十ヶ郷), 중향(中郷), 남향(南郷), 궁향(社家郷)이라는 다섯 지역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독특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자라났다. 당시 해면이 지금보다 높았던 시절, 작은 사이카를 비롯한 11개 마을은 만의 입구 근처에 위치했으며, 해변과 산이 가까워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선운에는 최적의 입지였다. 그들은 바다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기노카와 강과 와카가와 강을 거슬러 올라간 내륙은 두 강의 영향으로 비옥했고, 여기에 속한 지역들은 농업 생산에도 혜택을 받았다.
1585년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가 총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사이카의 주민은 말하자면 부유한 농부"라고 기록했으며, "군사적으로는 해륙 모두 네고로에 뒤지지 않으며, 전장에서의 무용으로 일본에서 크게 유명해졌다"고 소개했다. 선운과 농업, 이 두 기둥은 사이카슈의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토대였다. 하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전국시대의 전설로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철포였다.
1543년,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철포는 일본 전쟁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다네가시마에 철포 제조법이 전래되자, 네고로슈에 이어 사이카슈도 재빨리 철포를 받아들여 뛰어난 사수를 양성하고 철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전술을 고안하여 우수한 군사집단으로 성장했다.
사이카에서 철포가 제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이카에서는 이른바 '사이카 하치'라 불리는 독특한 철제 투구가 생산되었다. 유능한 투구 대장장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철포 제조 가능성을 시사한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카슈가 제조 기술만을 연마했던 사카이나 구니토모 마을과는 달리, 사수도 육성하여 전투집단으로 확립되었으며, 상시 5천에서 8천 정의 철포를 보유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 소유가 아니라, 조직화된 화력의 탄생이었다.
사이카슈가 가진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조직 구조였다. 사이카슈는 하나의 강고한 용병단이라기보다는 지연을 가진 독립된 단체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각 리더는 자신의 부하를 통솔할 뿐, 전체를 일괄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없었다. 이러한 분권적 구조는 약점이자 동시에 강점이었다. 필요할 때는 연대하고, 위급할 때는 각자의 독립성을 강조할 수 있는 유연한 체계였기 때문이다.
'사이카슈'라는 단어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혼간지의 렌뇨의 아들인 지츠죠의 《사심기》 1535년 6월 17일 조로, '사이카슈 300인 정도'가 오사카 본산에 내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사이카슈는 혼간지의 군사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이카 지역에는 정토종 서산파의 본산인 소지지도 있었고, 소지지 근처의 안라쿠지가 도바시 씨의 보리사였음이 판명되었다. 사이카슈를 단순히 정토진종 문도 집단으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다원적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분열되어 있었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삼인중 사이에 노다·후쿠시마 전투가 일어났을 때, 사이카슈는 양측에 나뉘어 싸웠다. 용병이었기 때문이다. 스즈키 손이치를 지도자로 하는 사이카슈는 용병부대로서 미요시 삼인중군에 가담했고, 한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응한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사이카슈와 네고로슈를 원군으로 보내 오다 노부나가군에 가담했다. 동족이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사이카슈의 본질이었다. 그들에게 충성의 대상은 주군이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였고, 전쟁은 생계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시야마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노부나가와 혼간지 겐뇨가 전면전에 돌입하자,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도성에서 추방되어 기이의 유라군에 있는 고쿠지에 들어가고, 같은 해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중신 유사 노부노리에게 살해되자, 많은 사이카슈는 이시야마 혼간지에 가담하여 오다 노부나가군과 싸웠다. 해변 지역인 사이카 장과 십개향의 사이카슈는 특히 정토진종 문도가 많았고, 혼간지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스즈키 손이치 시게히데가 이끄는 사이카슈는 3천 명의 철포 집단을 이끌고 이즈미 산맥에서 센슈 평야를 거쳐 이시야마 혼간지로 향했다. 사이카슈 3천은 겐뇨에게 3만의 병력에 버금가는 군단이었다. 이들의 전투 방식은 혁명적이었다. 손이치의 전투 방식의 특징은 개별적인 철포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대량의 철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대량의 철포를 집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효과성이 높아졌다.
1576년 5월, 텐노지 전투에서 사이카슈는 노부나가 자신과 직접 대치했다. 하나이 나오마사가 전사한 텐노지 전투에서 후속 부대로 출진한 노부나가와 직접 대치하며 쌍방에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 후 교토에 손이치의 가짜 목이 효수된 것만 봐도 그의 무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거짓 목이라도 효수해야 할 만큼 손이치는 노부나가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노부나가는 사이카슈를 굴복시키기 위해 1577년 2월, 사이카 세력이 농성한 이즈미와 기이에 공격을 감행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사노에 진군하여 자군을 신다치에서 야마테와 하마테 두 갈래로 나눠 기이에 쳐들어갔다. 3월 1일 사이카슈의 두목 중 하나이자 유력한 문도인 스즈키 손이치의 거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이 공세로 주변 일대가 황폐해지고 전선도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태를 우려한 사이카슈가 다음 날 오사카의 일에 배려를 더하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신청했고,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여 병력을 철수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노부나가의 대군을 막아낸 것 자체가 승리였다. 텐쇼 5년(1577) 2월, 6만 대군으로 사이카에 침공했지만 사이카슈의 게릴라전에 고전했고, 전황이 교착되자 화의를 맺었다. 8월에는 다시 7만 군세로 공격했지만 또다시 철저히 격퇴당해 고배를 마셨다. 천하인 노부나가가 지방의 자치 집단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이카슈의 강함이 그들의 분열을 초래했다. 1580년 혼간지가 노부나가와 화의한 후, 사이카슈 내부에서 친오다파와 반오다파로 의견이 분열했다. 친오다파는 스즈키 가문, 반오다파는 도바시 가문이 이끌었다. 자치와 독립성을 자랑하던 사이카슈의 특성이 이제는 내분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반오다파가 세력을 강화하여 스즈키 가문은 사이카에서 쫓겨났고, 이때 손이치의 행방도 불명이 되었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장악하면서 사이카슈의 운명은 더욱 가혹해졌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한 일을 완수하려 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기이를 공략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분열된 사이카슈는 통일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네고로슈와 함께 사이카슈는 섬멸당했다. 수십 년간 어떤 대명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자유의 전사들이, 내부 분열과 압도적인 중앙 권력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전국시대는 궁극적으로 대명 권력이 토호를 복속시켜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기이 국에서는 슈고인 하타케야마 씨의 본국이 가와치 국이었고, 하타케야마 씨가 일족 간 다툼을 벌이고 있어 기이 국내에 대명 권력을 확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이카슈는 하타케야마 씨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는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자유로운 행동도 허용받았다. 하지만 그 자유는 영원할 수 없었다. 전국시대는 분권에서 집권으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이었고, 사이카슈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사이카슈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은 전국시대라는 혼란 속에서 꽃핀 자유의 상징이었다. 주군을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의지로 싸움터를 선택했던 그들은, 중세 일본의 틈새에서 가능했던 독특한 존재였다. 철포라는 신무기를 통해 강대한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고, 때로는 그들을 물리쳤다. "사이카슈를 아군으로 삼으면 반드시 이기고, 적으로 삼으면 반드시 진다"는 말이 실제로 전국시대에 회자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취약함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지배구조가 없었기에 유연했지만, 그 유연함은 결속력의 결여를 의미했다. 내부 분열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고, 결국 그들은 분열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이카슈는, 자유 그 자체 때문에 멸망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 사이카슈와 같은 무장 자치 집단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평화는 중앙집권을 의미했고, 중앙집권은 지방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수백 년간 독립을 유지했던 사이카의 땅은 이제 막부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철포의 총성은 멎었고, 자유의 깃발은 내려졌다.
그러나 사이카슈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철포 전술은 일본 군사사의 한 획을 그었고, 중앙 권력에 맞선 지방 자치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카슈가 보여준 정신이다. 주군을 섬기는 것이 무사의 미덕이라 여겨지던 시대에,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해 싸웠다. 충성의 대상은 먼 곳의 영주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땅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다.
사이카슈의 이야기는 전국시대라는 혼돈의 시기에만 가능했던 자유의 실험이었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작은 자치 집단이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중앙집권과 봉건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그 틈새에서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기노카와 강 하류, 바다와 산이 만나는 그곳에서 울려 퍼졌던 철포의 총성은 이제 들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역사 속에 남아, 자유와 자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사이카슈는 패배했지만, 그들이 지키려 했던 가치는 패배하지 않았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했던 그들의 의지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2%AC%EC%9D%B4%EC%B9%B4%EC%8A%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