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97년, 한 로마 역사가가 처음으로 기록한 이름이 있다. "픽티(Picti)".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공격하는 야만인들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라틴어로 "그림을 그린 자들"을 의미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과 채색을 보고 이렇게 불렀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픽트족은 자신들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것은 돌에 새긴 신비로운 상징들뿐이다. 이 돌들은 오늘날까지 스코틀랜드의 동부와 북부 전역에 흩어져 서 있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픽트족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왜 사라졌는가? 그리고 그들이 남긴 상징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세기 초, 픽트족은 "잃어버린 신비의 민족"으로 여겨졌다. 학자들은 그들을 이국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1955년 출판된 영향력 있는 저서 『픽트족의 문제』는 이 주제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역사 기록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았고, 학자들은 픽트족을 하나의 통일된 민족으로 이해하려는 본질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의 연구는 이러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픽트족은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여러 부족과 씨족들이 모여 형성한 이질적인 연합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히려 외부의 압력, 특히 로마 제국의 위협에 대응하면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픽트족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오래되었다. 8세기 앵글로색슨 수도사 베다는 『영국민 교회사』에서 픽트족이 스키타이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먼저 아일랜드에 정착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브리튼 섬의 북부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베다는 픽트족이 아내가 없어서 스코트족에게 여자를 달라고 요청했고, 스코트족은 왕위 계승 시 여성 왕족 계통을 따르겠다는 조건으로 이를 허락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중세 시대의 기원 신화로서 흥미롭지만, 현대 과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3년 발표된 유전자 연구는 파이프의 런딘 링크스와 이스터 로스의 발린토어 묘지에서 발굴된 픽트 시대 유골 8구의 전체 게놈을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명확했다. 픽트족의 유전자는 철기시대 브리튼인들, 그리고 현재 서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노섬브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광범위한 유사성을 보였다. 그들은 외부에서 온 침입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착민의 후손이었다.
픽트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불렀던 곳이다. 로마 작가들은 이곳에 사는 부족들을 베르투리오네스, 타엑살리, 베니코네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은 소규모 씨족 공동체로 나뉘어 살았으며, 각 씨족은 하나 또는 여러 명의 족장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알렉스 울프는 "이들 부족은 단일 왕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로마 사료들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위기 상황에서 여러 족장 중 한 명이 전쟁 지도자로 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픽트족은 농경민이었다. 그들은 귀리, 호밀, 보리, 밀을 재배했고, 소, 양, 돼지를 길렀다. 스코틀랜드의 변덕스러운 기후에서 곡물을 건조하기 위해 가마를 사용했으며, 최근 발견된 증거에 따르면 물레방아도 이용했다. 픽트족의 일상생활 기술은 당시 아일랜드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기록한 픽트족의 모습은 평화로운 농부들이 아니었다. 로마 브리튼의 해안을 따라 약탈과 해적 행위를 일삼는 야만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고,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요새를 공격했다. 반나체로 싸웠고, 얼굴은 수염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몸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긴 창으로 적을 제압하고, 성벽을 넘어 약탈과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이러한 묘사는 로마의 선전이 섞여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픽트족이 강력한 전사 문화를 가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로마는 여러 차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안토니누스 성벽을 건설하여 픽트족을 막아야 했다. 이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도 보기 드문 방어적 조치였다.
픽트족의 진정한 힘은 7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 소왕국들이 있었지만, 그중 포르트리우 왕국이 북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역사가 알렉스 울프의 2006년 획기적 연구는 포르트리우가 중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모레이 만 지역에 위치했음을 밝혀냈다. 이 발견은 픽트 연구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애버딘 대학의 고든 노블 교수가 이끄는 노던 픽츠 프로젝트는 2012년부터 이 지역에서 놀라운 발견들을 이어가고 있다. 린니(Rhynie)에서는 5-6세기의 대규모 픽트 권력 중심지가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요새화된 울타리, 건물 흔적, 그리고 여러 개의 상징석이 발견되었다. 린니라는 이름 자체가 고대 켈트어로 "왕"을 의미하는 rīg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곳이 왕실 거주지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2013년, 애버딘 팀은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과 함께 거의 200년 전에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밭을 개간하던 중 발견했던 장소로 돌아갔다. 1800년대 노동자들은 은으로 만든 세 개의 화려한 유물—사슬, 나선형 팔찌, 손 핀—을 발견했지만, 더 이상 파지 않고 그 땅을 농지로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의 정밀한 발굴은 100개 이상의 새로운 유물을 발견해냈고, 이는 골크로스 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발견은 픽트 사회가 후기 로마 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로마 이후 시대에 재활용된 로마 은을 교역하고 교환했음을 보여준다. 픽트족은 고립된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범위한 교역망의 일부였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온 후기 로마 와인 앰포라 파편, 프랑스산 유리 술잔 조각들이 이를 증명한다.
버그헤드 요새는 픽트족의 군사력과 조직력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유적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이 요새는 삼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상부와 하부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19세기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면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파괴되었다고 여겨졌지만, 최근 발굴은 성벽이 예상보다 훨씬 잘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건물의 흔적, 금속 공예품, 무기, 머리핀과 옷핀들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밀집된 인구가 거주한 중요한 픽트 거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버그헤드에서는 황소가 새겨진 상징석 여섯 개가 남아 있는데, 원래는 훨씬 더 많은 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황소 상징이 힘과 다산을 나타내며, 버그헤드 요새의 성벽을 장식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던니케어는 또 다른 극적인 발견의 현장이다. 애버딘 남쪽의 해식 암주 위에 자리한 이 요새는 만조 때 고립되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문 암벽 등반가의 도움 없이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노던 픽츠 팀은 세 시즌에 걸쳐 이곳에서 발굴을 진행했고, 목재로 보강된 성벽과 일련의 건물 흔적을 발견했다. 심각한 해안 침식으로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로마 도자기와 유리, 핀과 브로치를 만들기 위한 주형과 도가니, 그리고 픽트 상징석에 새겨진 동물들과 유사한 작은 동물 조각상을 제작했던 증거 등 초기 중세 브리튼에서 알려진 금속 공예 생산 증거 중 가장 큰 규모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린니 맨(Rhynie Man)이 들고 있는 도끼 모양의 철제 핀이었다. 이는 유적지의 실물과 상징석의 도상학 사이에 실질적인 연결고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탭 오' 노스(Tap o' Noth)는 해발 563미터 높이의 언덕으로, 초기 철기시대 요새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발굴은 3-6세기에 픽트족이 철기시대 유적지 아래 경사면에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눈 덮인 케언고름 산맥이 남쪽으로 웅장하게 펼쳐지고, 모레이 만의 반짝이는 물이 북쪽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이 극한의 장소에서, 픽트족은 살았고, 요새를 건설했고, 그들의 상징을 새겼다. 왜 그들은 이렇게 가혹한 환경에서 거주지를 선택했을까? 노블 교수는 방어적 이유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소들이 가시성과 상징적 힘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멀리서도 보이는 이 요새들은 권력과 영토를 과시하는 표식이었다.
픽트족이 남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유산은 바로 그들의 상징석이다. 스코틀랜드 전역에 흩어진 약 350개의 픽트 상징석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등급 석판은 가공되지 않은 바위나 석판에 상징이 새겨진 것으로, 5-7세기에 제작되었다. 2등급 석판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픽트 상징과 함께 십자가가 있다. 이는 7-9세기, 기독교가 확산되던 시기의 것이다. 3등급 석판은 8-9세기의 가장 화려한 작품으로, 가장자리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복잡한 매듭 문양과 레이스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 도상을 담고 있으며, 픽트 상징은 포함하지 않는다.
픽트 상징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동물 상징(사슴, 늑대, 독수리, 물고기, 그리고 정체불명의 픽트 짐승), 기하학적 상징(초승달과 V-막대, 이중 원반과 Z-막대, 거울, 빗), 그리고 일상 용품 상징들이다. 약 50개의 서로 다른 상징이 문서화되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쌍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개인이나 집단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앤서니 잭슨은 상징 쌍이 모계 혈통을 따르는 혼인 동맹을 나타낸다고 제안했다. 다른 이들은 이것이 종교적 이미지이거나 문장(紋章)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2010년 발표된 획기적 연구는 통계적 엔트로피 분석을 사용하여 픽트 상징이 무작위 배열이 아니라, 문자 언어의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각 상징이 단어를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중국어 문자 체계처럼, 각 상징이 하나의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를 해독할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 2018년 애버딘의 돈 강에서 낮은 수위로 인해 새로운 1등급 픽트 상징석이 발견되었다. 삼중 원반에 십자 막대, 거울, 그리고 내부에 두 개의 나선이 있는 톱니 모양 직사각형이 새겨져 있었다. 스코틀랜드 역사환경청의 커스티 오웬은 "우리는 이 발견에 매우 흥분하고 있다. 수위가 다시 올라가기 전에 석판을 회수할 수 있는 짧은 기회의 창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고 말했다. 고든 노블은 "돌에 새겨진 독특한 상징 세트 덕분에 우리는 그것이 픽트 전통에 속한다는 것을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전역에 200개 이상의 이러한 석판이 있지만, 각각은 독특하며 이것은 기록의 공백을 메우고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문자 발달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환상적인 사례이다"라고 설명했다.
상징석 외에도 픽트족은 정교한 금속 공예품을 남겼다. 은으로 만든 체인, 팔찌, 핀에도 상징이 새겨져 있다. 2등급 석판에는 기독교 이미지와 함께 사냥 장면,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에버렘노 III 픽트 십자 석판의 한 면에는 초승달과 V-막대, 이중 원반과 Z-막대 상징이 있고, 그 아래에는 픽트 기마병이 개를 데리고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다른 면에는 전투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685년 네흐탄스미어 전투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이 전투에서 픽트족은 노섬브리아의 앵글족을 격퇴했고, 이는 픽트 역사에서 중요한 승리였다.
픽트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발굴된 거주지는 잔디 벽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집들이었다. 로마인들이 묘사한 공격적인 야만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픽트족은 주로 분산된 농경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린니, 포트마호맥, 버그헤드 같은 곳에서 발견된 증거는 훨씬 복잡한 사회 구조를 시사한다. 이곳들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권력 중심지였다. 요새화된 울타리, 금속 공예 작업장, 교역 물품의 흔적은 픽트 사회에 전문화된 장인, 교역 네트워크, 그리고 잉여 생산물을 통제할 수 있는 엘리트 계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포트마호맥 발굴에서는 8세기 수도원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필사본 제작과 금속 공예가 이루어졌다. 픽트족은 단순히 전사가 아니라, 장인이자,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기독교의 도래는 픽트 문화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563년경 성 콜룸바가 그레이트 글렌을 따라 선교 여행을 하면서 픽트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베다는 콜룸바가 픽트 왕 브리데를 개종시켰다고 기록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보다 더 점진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초기 상징석에는 이교적 상징만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7-8세기의 2등급 석판은 이 전환기를 보여준다. 픽트 상징과 기독교 십자가가 같은 돌에 공존하며, 두 믿음 체계가 평화롭게 통합되었음을 암시한다. 돌에 훼손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종교가 폭력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기독교는 기존의 픽트 전통과 융합되었고, 이는 그들의 예술에 반영되었다.
로즈마키 석판과 니그 석판 같은 2등급 작품들은 픽트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복잡한 매듭 문양, 나선 문양, 트럼펫 패턴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의 정교한 금속 공예품과 유사한 스타일이다. 이러한 석판들은 원래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을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거친 날씨에 색이 씻겨 나갔지만, 원래는 빨강, 파랑, 노랑의 생생한 색채로 빛났을 것이다. 선드위크 석판이나 니그 석판을 상상해보라. 높이 2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십자 석판이 밝은 색으로 칠해진 채 풍경 속에 서 있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픽트 언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중세 사료들은 픽트어의 존재를 언급하며, 증거는 그것이 남쪽의 켈트 브리튼인들이 사용하던 브리튼어와 관련된 섬 켈트어였음을 보여준다. 일부 픽트 석판에는 오검(Ogham)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4세기 이전에 아일랜드에서 발명된 알파벳의 한 형태로, 주 수직선을 가로지르는 일련의 짧은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랜즈버트 석판과 뉴턴 석판에서 오검 비문이 발견되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포트마호맥에서 발견된 한 석판에는 히베르노-색슨 대문자로 새겨진 불완전한 라틴어 비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레오...리우스를 기념하여...이 날..." 이 비문은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종교 엘리트의 존재를 시사한다. 하지만 일반 픽트인들은 무엇을 말했을까? 픽트어는 9세기 후반부터 중세 게일어에 의해 점차 대체되었고, 게일화의 더 넓은 과정의 일부로 사라졌다.
픽트족의 종말은 그들의 기원만큼이나 논쟁적이다. 전통적인 서사는 843년 달리아다의 스코트족 왕 케네스 맥알핀이 픽트 왕위를 차지하면서 두 왕국을 통합하여 알바 왕국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중세 스코틀랜드 왕국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픽트족이 정복당했다거나 학살당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점진적인 통합과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픽트 왕권"의 개념은 몇십 년간 지속되다가 카우스탄틴 맥 아에다의 통치 기간에 폐기되었다. 픽트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했다. 그들의 언어는 게일어로 대체되었고, 그들의 정체성은 새로운 스코트 정체성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남았다. 현대 스코틀랜드 사람들, 특히 동부와 북부 주민들은 픽트족의 후손이다.
바이킹의 침략도 픽트 사회의 변화를 가속화했을 것이다. 9세기 노르웨이인들은 셰틀랜드, 오크니, 그리고 스코틀랜드 본토의 북부 해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버그헤드 같은 해안 요새들은 바이킹 습격에 취약했다. 외부 압력은 픽트 왕국들을 약화시켰고, 달리아다의 스코트족과의 동맹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포트리우의 마지막 독립 왕들은 서쪽의 게일 문화와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혼인 동맹이 맺어졌고, 게일어가 엘리트 계층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 수도원들은 게일 전통을 채택했다. 이것은 침략이 아니라 융합이었다.
9세기 중반부터 픽트라는 이름은 역사 기록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알바인, 즉 알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등장했다. 하지만 픽트 문화의 요소들은 계속 존재했다. 10세기의 일부 석판은 여전히 픽트 예술 양식을 보여주지만, 상징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상징 전통은 9세기 후반에 끝났다. 왜일까? 아마도 상징을 이해하고 새길 수 있는 장인들이 사라졌거나, 상징이 표현하던 사회 구조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 게일 문화는 다른 형태의 정체성 표현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 픽트 상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픽트족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언어는 사라졌고,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그들의 유산은 여전히 스코틀랜드 전역에 서 있다. 350개의 상징석은 침묵 속에서 증언한다. 그들은 한때 이곳에 강력한 문명이 존재했음을, 로마도 정복하지 못한 전사들이 살았음을, 정교한 예술을 창조한 장인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현대 기술은 이 돌들에서 새로운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3D 스캐닝과 사진측량법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부 사항을 드러낸다. 레이저 스캔은 수세기 동안 침식된 상징의 흔적을 찾아낸다. 2017년 던니케어 석판을 스캔한 결과,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조각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픽트족 연구는 지금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노던 픽츠 프로젝트는 매년 새로운 발견을 보고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의 참여를 통해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발굴에 참여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연구는 계속되었다. 고든 노블 팀은 원격 감지 기술과 항공 레이저 스캔 데이터를 사용하여 숲과 농지 아래 숨겨진 새로운 픽트 유적지를 발견했다. 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 기술은 식생을 투과하여 지면의 미세한 기복을 포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수십 개의 요새와 거주지가 지도에 표시되었다. 스코틀랜드의 픽트 고고학 지도는 매년 확장되고 있다.
유전학 연구도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2023년 발표된 연구는 픽트 시대 인구가 철기시대 브리튼인들의 직계 후손임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시 다른 브리튼 인구와 광범위하게 혼혈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픽트 사회가 고립되지 않았으며, 결혼과 이주를 통해 이웃 집단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했음을 의미한다. 픽트 무덤에서 발견된 개인들의 게놈은 현대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그리고 아일랜드인의 유전적 조상과 일치한다. 픽트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중에 살아있다.
픽트족의 이야기는 정체성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한 민족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의 언어가 흔적 없이 소멸할 수 있을까? 중세 스코틀랜드 왕국을 건설한 게일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강조하고 픽트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스코트족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픽트족을 이교도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14세기 스코틀랜드의 국민 서사시 『존 바버의 브루스』는 픽트족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16세기에 이르러 픽트족은 이미 신화와 전설의 영역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상징석은 "드루이드의 돌"이라고 불렸고, 그들의 진정한 역사는 잊혔다.
하지만 돌은 기억한다. 메이글 박물관에 보관된 픽트 석판들을 보면, 1,300년 전 장인의 솜씨를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손이 돌을 쓰다듬으며 깊이를 측정하고, 망치가 정을 때리며 선을 새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한 석판을 완성하는 데 몇 주, 어쩌면 몇 달이 걸렸을 것이다. 누가 이 작업을 의뢰했을까?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살아있는 자의 권력을 선언하기 위해서였을까? 독수리, 물고기, 초승달, V-막대—이 상징들은 한때 분명한 의미를 전달했다. 모든 픽트인이 그것을 보고 이해했다. 그것은 이름이었을까, 가문이었을까, 영토 표시였을까? 우리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현대 스코틀랜드에서 픽트족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명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Pit-"으로 시작하는 마을 이름들—피트로드리, 피틀로크리, 피텐크리프—은 픽트어 "pett"(토지의 일부를 의미)에서 유래했다. "Aber-"로 시작하는 이름들—애버딘, 아버펠디, 아버네시—은 브리튼어로 "강 입구"를 의미한다. 이 지명들은 픽트 언어의 마지막 메아리이며, 수세기 동안 살아남아 그들이 한때 여기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픽트족의 정치적 유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의 왕국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핵심 영토가 되었다. 픽트 귀족들은 게일화되었지만, 그들의 토지, 권력, 혈통은 유지되었다. 중세 스코틀랜드 백작령 중 다수—파이프, 앵거스, 메른즈, 아서—는 옛 픽트 왕국의 경계를 따랐다. 스코틀랜드의 정치 지리는 픽트 시대의 영토 분할을 반영한다. 스코틀랜드의 정체성 자체가 픽트와 스코트의 융합에서 태어났다. 만약 843년에 통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픽트족은 또한 문화적 상상력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픽트족은 고귀한 야만인, 로마 제국에 맞선 자유의 전사로 재발견되었다. 월터 스콧 경은 그의 소설에서 픽트족을 언급했고, 빅토리아 시대 화가들은 문신으로 뒤덮인 픽트 전사를 그렸다. 20세기에 픽트 상징은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들은 티셔츠, 장신구, 문신 디자인에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상징들은 더욱 강력하다. 그들은 빈 캔버스가 되어 현대의 의미로 채워질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픽트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증했다.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의 픽트 전시는 수십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모았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고고학자들과 함께 발굴 현장을 찾아갔다. 소셜 미디어는 새로운 발견을 순식간에 확산시킨다. 2018년 돈 강의 상징석 발견은 트위터에서 수천 번 공유되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픽트족에 매료되는가? 아마도 그것은 미스터리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것, 해독되지 않은 것,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한 매혹. 우리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했고, 마야 문자를 번역했지만, 픽트 상징은 여전히 비밀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만이 아니다. 픽트족의 이야기는 회복력과 저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가장 위대한 군대에 맞섰고 결코 정복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혹한 기후에서 번영했고, 복잡한 사회를 건설했으며,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했다. 그들의 상징석은 권력과 신념의 선언이다. "우리는 여기 있었다. 우리는 중요했다. 우리를 기억하라." 그리고 우리는 기억한다. 매년 더 많은 고고학자들이 스코틀랜드의 들판을 발굴하고, 더 많은 학생들이 픽트 역사를 공부하며, 더 많은 관광객이 상징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한다.
픽트족의 가장 큰 유산은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들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과거가 결코 완전히 알려질 수 없으며, 역사는 항상 재해석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새로운 발굴은 오래된 이론을 뒤집는다. 새로운 기술은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낸다. 픽트족은 한때 잃어버린 민족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안다. 그들은 단지 변화했을 뿐이다. 그들의 돌, 그들의 유전자, 그들의 지명, 그들의 영토가 남아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코틀랜드의 황야를 여행하다 보면,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상징석을 만날 수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하늘은 회색이며, 히스가 보라색으로 피어있다. 돌에 다가가 손을 얹으면, 차갑고 거칠다. 수세기의 비와 바람이 표면을 깎아냈지만, 상징은 여전히 선명하다. 초승달과 V-막대. 이중 원반. 픽트 짐승. 1,300년 전 누군가가 이 상징들을 새겼다. 그 순간, 시간의 거리가 사라진다. 당신은 그 장인과 연결된다. 그는 당신이 여기 서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는 당신이 궁금해하기를, 질문하기를,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한다. 픽트족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이것이다. 잊히기를 거부하는 존재의 증명. 돌 속에 영원히 새겨진 목소리. "우리는 여기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