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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천하패도의 끝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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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음력 9월 15일 새벽, 짙은 안개가 깔린 미노국 세키가하라 평원에 일본 역사상 가장 거대한 두 군세가 대치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진군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7만 5천, 서쪽에서 맞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8만 4천. 총 16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동서 4km, 남북 2km에 불과한 좁은 분지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단 6시간 뒤, 이 전투는 끝났다. 서군은 궤멸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실질적인 천하인이 되었다. 이후 250년 이상 지속될 에도 막부의 서막이 올랐다. 무엇이 이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의 운명을 갈랐는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전장의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 이 전투는 우연히 그곳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키가하라는 북쪽으로 이부키 산, 남쪽으로 스즈카 산맥, 동쪽으로 난구 산, 서쪽으로 이마스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나카센도는 동쪽으로는 키소 지방, 서쪽으로는 오사카로 연결되며, 북쪽의 북국가도와 남쪽의 이세 가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미쓰나리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전략적 통찰의 결과였다. 서군은 세 개의 고지를 먼저 점령하여 동군을 반포위하는 형태로 배치할 수 있었다. 병력에서도 우위였고, 지형도 유리했다. 적어도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서군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진정한 승부처는 전장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사망한 후, 일본은 권력의 공백기로 접어들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유일한 혈통인 다섯 살짜리 아들 히데요리를 위해 오대로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가 공동으로 정사를 맡고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보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히데요시의 사후 빠르게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정략결혼을 통해 유력 다이묘들과 연합을 맺기 시작했고, 이는 히데요시가 정한 규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가장 충실한 가신이었다. 행정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그는 오부교 중 한 명으로 히데요시 정권의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미쓰나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무장들 사이에서 인망이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무단파 장수들은 전쟁 중 그가 보인 태도를 잊지 않았다. 미쓰나리는 강화 교섭을 주도하며 전선에서 고립된 부대들의 철군을 독려했는데,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같은 무장들은 이를 자신들의 전공을 폄하하고 히데요시에게 부정적으로 보고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히데요시 사후, 이들은 미쓰나리를 습격하려 했고, 미쓰나리는 역설적으로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쓰나리를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미끼로 사용했다. 1600년 6월,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구실로 토벌에 나섰다. 이것은 정교하게 계산된 도발이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가 반드시 거병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시나리오였다. 미쓰나리가 먼저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는 충신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는 완벽한 각본이었다.

미쓰나리는 예상대로 움직였다. 그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서군을 결성했다. 하지만 여기서 서군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났다. 모리 데루모토는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 오사카성에 머물며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한다는 핑계로 출전하지 않았다. 실질적 지휘는 미쓰나리가 맡았지만, 그에게는 대다이묘들을 통솔할 권위가 없었다. 서군은 표면적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으로 뭉쳤지만, 내부적으로는 각자의 이해관계로 갈라져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였다. 히데요시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이자 한때 히데요시의 후계자로까지 여겨졌던 그는 1만 5천이라는 막대한 병력을 이끌고 마쓰오 산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양측 모두 그의 선택을 알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에게 비젠과 미마사카 2개국을 약속했고, 미쓰나리는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의 지위와 긴키 지방 2개국을 제안했다. 히데아키는 전투 직전까지도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양측 모두를 저울질할 이유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히데요시에게 입은 은혜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영지를 감봉당했을 때 이에야스가 중재해준 빚이 있었다.


1600년 음력 9월 15일 오전 8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선봉은 동군이 날렸지만, 그것은 기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동군의 선봉장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첫 공격을 주저하자, 이에야스의 중신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가 철포대를 이끌고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의 본진 앞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안개 속에서 일제히 철포를 발사하고 재빨리 후퇴했다. 이것은 도발이었고, 서군은 응사할 수밖에 없었다. 양군의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정오까지 전황은 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밀어붙였고, 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도 도도 다카토라 부대를 패퇴시키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본진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초조했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마쓰오 산의 고바야카와 진영으로 향했다. 히데아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전황이 서군에게 유리해질수록, 히데아키의 망설임은 깊어졌다. 어쩌면 그는 승자가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철포대에게 히데아키의 진영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총탄이 마쓰오 산 쪽으로 날아갔다. 이것이 실제로 히데아키를 움직이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어떤 사료는 히데아키가 이미 동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으며, 단지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해석은 위협사격이 그의 결단을 재촉했다고 본다. 진실이 무엇이든, 결과는 명확했다. 히데아키는 1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오타니 요시츠구였다. 요시츠구는 히데아키의 배신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나병을 앓고 있어 가마에 실려 다녔지만, 전술적 통찰력만큼은 뛰어났다. 히데아키의 공격이 시작되자, 요시츠구의 부대는 즉각 반격했다. 놀랍게도 1만 5천 대군은 일시적으로 밀렸다. 하지만 숫적 우세는 결국 효과를 발휘했고, 요시츠구의 부대는 점차 압도되었다. 더 큰 문제는 히데아키의 배신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킷카와 히로이에 등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전선을 이탈하거나 공격을 중지했다. 서군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미쓰나리는 끝까지 싸웠지만, 전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오후 2시경,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동군은 병력의 5%를 잃었지만, 서군은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미쓰나리는 전장을 탈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붙잡혔다. 그는 이에야스 앞에서 일절 말이 없었고, 교토의 로쿠조하라에서 참수당했다. 서군의 다른 주요 인물들도 영지를 몰수당하거나 처형되었다. 반면 동군에 가담한 장수들은 대폭 가증되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약속대로 비젠, 빗추, 미마사카 50만 석의 대다이묘가 되었다.

하지만 히데아키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불과 2년 후인 1602년, 2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사인은 불분명하지만, 일부 기록은 그가 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시달렸다고 전한다. 또 다른 기록은 그가 배신자라는 비난에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고 말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후일 일본인들이 맹세를 할 때 "고바야카와처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이름이 배신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가 죽은 후 고바야카와 가문은 후사가 없어 단절되었고, 그의 옛 가신들은 배신자의 부하라는 낙인 때문에 어디에도 사관되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표면적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훨씬 복잡했다. 이것은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문치파와 무단파 간의 갈등이었고, 중앙집권파와 지방분권파의 충돌이었으며, 무엇보다 개인적 야망과 충성심 사이의 선택이었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에서 싸웠지만, 그의 독선과 인망 부족이 결국 서군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이에야스는 교묘하게 명분을 확보하면서도 실리를 취했고, 무엇보다 전투 이전부터 서군 내부의 균열을 파고드는 정보전과 포섭전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가 일본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고, 그의 후손들은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을 지배했다. 세키가하라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조를 재편한 사건이었다. 승자는 관대함을 보이지 않았다.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의 영지는 대폭 삭감되었고, 그렇게 확보된 토지는 동군 장수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가신들과 일족을 전국의 요충지에 배치하여 중앙집권적 통제를 확립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조차 220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감봉되어 일개 다이묘로 전락했다.

흥미롭게도 세키가하라의 원한은 25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남아 있었다. 서군 편이었던 조슈와 사츠마 번은 그 치욕을 잊지 않았고, 그들의 후손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중심세력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역사의 복수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세키가하라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다"는 표현은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승부처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 전투터에는 여전히 참전 장수들의 진지 흔적과 기념비가 남아 있고,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 근처 마을 주민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산에 올라가 전투를 구경했다는 일화는, 당시 사람들도 이것이 역사를 가르는 순간임을 직감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병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신뢰와 배신으로 결정되었다. 이에야스는 전투 이전에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그는 적의 내부를 분열시켰고, 충성심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미쓰나리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사람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신뢰라는 교훈을 이 전투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키가하라 평원의 그 안개 낀 새벽은, 충성과 배신, 명분과 실리, 이상과 현실이 격돌한 순간이었고, 그 결과는 이후 수백 년간 일본의 운명을 규정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2%A4%EA%B0%80%ED%95%98%EB%9D%BC_%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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