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일본은 권력의 진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1467년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중앙 통제력은 완전히 붕괴했고, 천황은 교토의 황궁에서 재정적 곤궁 속에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독립된 군주처럼 행세하며 '하극상'의 풍조 속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센고쿠지다이, 즉 전국시대라 불리는 이 혼란의 시기는 단순한 정치적 무질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동성을 극대화시킨 격변의 시대였다. 전통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실력과 책략만이 생존을 보장했고,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무사가 되고 오늘의 무사가 내일의 다이묘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틈새에서, 1537년 오와리 지방 나카무라의 한 농민 가정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기노시타 도키치로, 훗날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 상승의 주인공이 될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각인된 이 남자는 단순히 권력을 쟁취한 무장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충격을 가한 거대한 폭풍이었다. 그의 생애는 한 개인의 야망이 시대의 흐름과 만나 어떻게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히데요시의 초기 생애는 전설과 사실이 뒤섞여 있지만, 그가 오와리 지방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아버지는 아시가루, 즉 보병으로 복무했던 하급 무사 출신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어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그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당시 일본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가 지배하던 시대였고, 농민의 자식이 무사 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천하인이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라는 극단적 혼란은 역설적으로 재능 있는 자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시절부터 재치와 민첩함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외모는 당대 기준으로 볼품없었다고 전해지는데, 작은 키에 원숭이를 닮았다 하여 '사루(원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이러한 신체적 핸디캡을 지적 기민함과 사교적 재능으로 극복했다. 그는 10대 시절 방랑하며 여러 주군을 섬겼고, 바늘 장사를 하며 상업적 감각도 익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은 후에 그가 단순한 무장이 아닌 정치가이자 행정가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558년경, 스물을 갓 넘긴 히데요시는 마침내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신하가 된 것이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뿐 아니라 일본 역사의 흐름 자체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히데요시가 보여준 능력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무엇보다 인간 심리를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을 지녔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 안에 넣어 따뜻하게 해두었다는 유명한 일화는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그의 능력을 상징한다. 노부나가는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고 실력주의를 추구한 혁명적 인물이었고, 히데요시 같은 하층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중용하는 개방적 태도를 지녔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주군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그는 처음에는 노부나가의 초석(草履, 짚신) 담당 시종으로 시작했지만, 곧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561년 모리야마 전투에서 작은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그는 점차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특히 1566년 이나바야마성 공략 당시, 그는 단 하룻밤 사이에 스노마타에 성을 건설한다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사실 이는 미리 준비한 자재를 신속히 조립한 것이었지만, 적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아군의 전진 기지를 확보하는 전략적 가치는 엄청났다. 히데요시는 전장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그의 진정한 강점은 외교와 협상에 있었다. 그는 적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보다는 계략과 회유로 항복시키는 데 탁월했고, 이는 후에 일본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강점이 되었다. 1573년 아사이 나가마사를 공략할 때나 1577년부터 시작된 주고쿠 지방의 모리 가문과의 대치에서도, 그는 군사력만이 아니라 경제 봉쇄, 내부 분열 조장, 협상 등 다층적 전략을 구사했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이러한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점차 넓은 영지와 큰 권한을 부여했다. 1573년에는 하리마 지방의 통치권을 받았고, 1580년에는 하리마, 타지마, 이나바 세 지방의 다이묘로 승진하여 독자적인 영지를 경영하는 위치에 올랐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단순한 무장에서 영주로, 전술가에서 전략가로 진화하고 있었다.
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은 히데요시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교토의 혼노지 사원에서 포위당하고 자결했을 때, 히데요시는 주고쿠 지방에서 모리 가문의 요새인 다카마쓰성을 포위 공격하는 중이었다. 노부나가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의 대응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여기서 그의 정치적 천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먼저 노부나가의 죽음이라는 정보가 적에게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그런 다음 모리 가문과 신속히 강화 협상을 타결했는데, 이때 그는 상당한 양보를 하면서까지 즉각적인 평화를 선택했다. 다카마쓰성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받아내는 대신 모리 가문의 영토를 보장하고 포위를 풀었던 것이다. 이후 히데요시는 불과 10일 만에 약 23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강행군하여 교토로 돌아왔다. 이른바 '주고쿠 대회군'으로 불리는 이 신속한 기동은 군사사에서도 기적으로 평가받는다.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면서 이토록 빠른 속도로 대군을 이동시킨 것은 탁월한 병참 능력과 지도력의 증거였다. 6월 13일,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주군의 원수를 갚았다. 미쓰히데는 패주하던 중 농민들에게 습격당해 죽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 히데요시를 노부나가의 정통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정치적 승리였다. 그는 신속한 대응과 의리를 지킨 가신이라는 이미지를 확립하며, 오다 가문 내에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역사가들은 만약 히데요시가 주고쿠에서 며칠만 늦게 출발했더라도, 혹은 미쓰히데가 더 철저한 준비를 했더라면 일본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이 순간은 히데요시 개인뿐 아니라 일본 전체의 운명이 걸린 기로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놀라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오다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1582년 6월 27일 기요스 회의에서 그는 절묘한 정치적 균형감각을 보여주었다. 노부나가의 적장자인 노부타다도 혼노지에서 함께 죽었기에 후계 문제가 복잡했는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나 삼남 노부타카가 아닌, 노부타다의 어린 아들 산보시(훗날 오다 히데노부)를 후계자로 추대했다. 이는 전략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린 아이를 명목상의 당주로 세우면서 자신은 후견인으로서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분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실질적 권력을 움켜쥐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은 순탄하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오랜 가신이자 북쪽 영지를 다스리던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요시의 급속한 권력 상승을 견제하려 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는 오다 가문의 헤게모니를 놓고 벌어진 결정적 대결이었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도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했다. 가쓰이에가 기후를 공격하자 구원군을 보내는 척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시즈가타케로 급행하여 적의 허를 찔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히데요시는 가쓰이에를 자결로 몰아넣고 오다 가문 내 최대 라이벌을 제거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진정한 천재성은 정복한 영지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자신의 통치 체제 안으로 흡수한 데 있었다. 그는 무력만이 아니라 혼인 동맹, 영지 재배치, 경제적 보상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동맹을 맺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와 충돌했을 때도, 군사적으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과감히 화의를 제안하여 이에야스를 사실상의 종속 동맹자로 만들었다. 1585년 7월, 히데요시는 간파쿠(관백)라는 최고 문관직에 올랐다. 이는 무사 출신으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농민 출신이 천황의 섭정에 해당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후지와라 가문으로 위조하여 형식적 요건을 충족시켰다. 1586년에는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오다 가문의 가신이 아니라 천황의 권위를 직접 빌려 일본을 통치하는 새로운 권력자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무력으로 천하를 장악하려 했다면, 히데요시는 무력과 권위를 결합하여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히데요시의 국내 통치 정책은 혁명적이었고, 그 영향은 수세기 동안 일본 사회를 규정했다. 그가 1582년부터 시작하여 1598년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 도지 측량사업인 '태합검지'는 단순한 토지 조사를 넘어선 사회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일본의 토지 소유권은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었다. 귀족이 명목상 소유하고, 사찰이 권리를 주장하며, 지역 무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농민이 경작하는 식의 다층 구조였다. 히데요시는 이 모든 복잡한 권리를 정리하고, 토지의 실제 생산력을 '고쿠다카(석고)' 단위로 정확히 측정했다. 측량관들이 전국의 논밭을 일일이 측정하고 생산량을 산정했으며, 이를 토대로 과세 체계를 확립했다. 이 작업은 중앙 정부가 전국의 경제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각 다이묘의 실질적 힘도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 다이묘가 '50만 석의 영지'를 가졌다는 것은 그가 보유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더 나아가 1588년의 '도검 수거령'은 사회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급진적 정책이었다. 히데요시는 전국의 농민들로부터 칼과 창, 총 등 모든 무기를 몰수하여 교토의 대불 건립에 사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사업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농민 봉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무사 계급과 농민 계급을 명확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무사는 싸우고, 농민은 농사짓는다'는 엄격한 신분제가 확립되었다. 1591년에는 '신분 통제령'을 발표하여 무사가 상인이나 농민이 되는 것, 또는 그 반대의 신분 이동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민 출신으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 자신이 신분 이동의 사다리를 완전히 걷어차버린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 올라온 길을 후대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들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 농민들은 전쟁에 동원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사 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사회적 유동성을 차단하여 에도 시대 250년 동안 지속될 경직된 신분제 사회의 토대를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또한 상업 정책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시장을 활성화했으며, 화폐 통일을 추진했다. 오사카를 상업 중심지로 육성하여 전국의 물자가 모이는 경제 수도로 만들었다. 이러한 경제 정책은 통일 일본의 물질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590년 7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성을 함락시키고 관동 지방을 지배하던 고다이묘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면서, 마침내 일본 전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오다와라 공성전은 히데요시의 총체적 국력을 과시하는 장관이었다. 그는 20만 대군을 동원했고, 공성전을 펼치면서도 성 주변에 임시 도시를 건설하여 상인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다도회와 노 공연까지 열었다. 이는 단순한 여유의 과시가 아니라 철저한 심리전이었다. 성 안의 호조 가문에게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저항 의지를 꺾는 전략이었다. 결국 호조 우지마사와 우지테루는 항복하고 할복했다. 히데요시는 이 승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관동 지방으로 전봉시켰는데, 이는 겉으로는 더 넓은 영지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에야스를 오랜 근거지인 미카와에서 떼어내어 중앙에서 멀리 보내는 전략적 조치였다. 농민의 아들에서 천하인으로, 이 불가능해 보였던 여정은 단지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전국시대가 열어놓은 기회, 오다 노부나가라는 혁명적 주군과의 만남, 그리고 무엇보다 히데요시 자신의 탁월한 능력이 결합하여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신분 상승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오른 히데요시는 새로운 야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국내 통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동아시아 전체를 호령하는 대제국을 꿈꾸게 되었다. 명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대륙을 장악하겠다는 이 무모한 계획은 여러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첫째, 통일 이후 갈 곳 잃은 수많은 무사들의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백여 년간 전쟁으로 단련된 무사 계급을 평화 시대에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는 심각한 문제였다. 둘째, 히데요시 개인의 무한한 야망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일본이라는 작은 섬나라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셋째, 국제 무역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를 재편하려는 경제적·외교적 의도도 있었다. 그는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 포르투갈령 고아 총독, 심지어 인도의 무굴 제국에까지 사신을 보내 복종을 요구했다. 이러한 팽창주의적 야망은 노년에 접어든 히데요시의 판단력 저하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사건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명나라 침공을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무례한 요구를 했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592년 4월 약 15만 8천의 대군을 보내 침공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초기 일본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불과 20일 만에 한성을 점령했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는 각각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일본군이 이처럼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방비가 허술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백여 년간 실전을 경험한 일본 무사들의 전투력과 조총의 위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황은 곧 교착 상태에 빠졌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등에서 보여준 이순신의 전략적 천재성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육지에서는 곽재우, 김덕령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특히 보급선이 끊긴 일본군은 현지에서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 백성들의 극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593년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한성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4년간의 협상 끝에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14만 대군을 보냈지만, 이번에도 전황은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저항은 더욱 조직적이었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 7년에 걸친 이 전쟁은 세 나라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다. 특히 도자기 장인, 인쇄공, 학자 등 숙련된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납치되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명나라는 막대한 군비 지출로 국력이 쇠퇴하여 결국 청나라에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역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전쟁에 참여한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 야망은 그의 정치적 판단력이 만년에 이르러 심각하게 흐려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동시에 여러 첩을 둔 끝에 늦게 얻은 아들 히데요리에 대한 집착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는 조카이자 양자였던 히데쓰구를 후계자 위협으로 간주하여 1595년 할복을 명했고, 히데쓰구의 처자식 30여 명을 모두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권력의 정점에서 히데요시는 점차 편집증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1598년 9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서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가운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장래를 염려하며 다섯 명의 대로(大老)—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히데요리의 후견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이들에게 혈서로 맹세까지 받았지만,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히데요시는 아마도 자신의 사후 권력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 소식은 처음에는 비밀에 부쳐졌고,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에게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권력 구조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다른 다이묘들과 사적으로 혼인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고, 이는 히데요시가 금지했던 행위였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 대신들과 무단파 무장들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전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서군의 핵심 부대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여 동군 편으로 돌아서면서 불과 몇 시간 만에 승부가 결정되었다. 이에야스의 승리로 도요토미 가문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 칭호를 받으며 에도 막부를 열었지만, 형식상으로는 히데요리를 존중하는 척했다. 오사카성에 거주하던 히데요리는 여전히 막대한 재산과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재적 위협이었다. 1614년 방광사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마침내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오사카 겨울의 진과 여름의 진으로 불리는 두 차례 전투 끝에, 1615년 6월 4일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는 불과 8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이로써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17년 만에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진 셈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일본 역사에 남긴 유산은 그의 가문이 멸망한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가 확립한 토지 조사 체계는 에도 시대 내내 일본의 조세 제도 기반이 되었고, 석고제는 다이묘의 힘을 측정하는 표준 단위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가 고착화시킨 신분 제도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약 280년간 일본 사회의 기본 골격으로 작용했다.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 무사 계급의 특권적 지위, 농민의 토지 귀속 등은 모두 히데요시 시대에 제도화되었다. 상업과 도시 정책에서도 그의 영향은 컸다. 오사카는 그가 육성한 대로 에도 시대 내내 '천하의 부엌'으로 기능하며 일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는 또한 문화 후원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차도를 장려하여 일본 문화의 정수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센노 리큐와의 관계는 유명한데, 히데요시는 리큐의 '와비차(侘び茶)' 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황금 다실을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미학과 권력의 긴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1591년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할복을 명했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정치적 이유설, 미학적 갈등설 등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는 권력자 히데요시의 잔혹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건축 분야에서 히데요시가 남긴 유산도 상당하다. 오사카성은 그의 권력과 야망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거대한 석축, 황금으로 장식된 내부, 광대한 규모는 보는 이를 압도했다. 비록 원래의 천수각은 오사카 전투에서 소실되었지만, 그가 구상한 성곽 도시의 개념은 에도 시대 성곽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시미 모모야마성도 마찬가지로 호화로웠는데, 이 시기의 예술 양식을 '모모야마 문화'라 부를 정도로 그의 치세는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화려한 금박 장식, 역동적인 그림, 웅장한 건축이 특징인 모모야마 문화는 전국시대의 역동성과 새로운 통일 국가의 자신감을 반영했다. 대외 관계에서도 히데요시의 정책은 이후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조선 침략은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와 기술을 흡수할 수 있었다. 납치된 도자기 장인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고, 인쇄 기술도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을 경계하여 1587년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의 전조가 되었다. 그는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했고, 외세의 침투 가능성을 우려했다.
히데요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복잡하고 양가적인 평가를 받는다. 일본 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를 일본 통일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해왔다. 그는 분명 뛰어난 전략가이자 행정가였으며, 백여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정치가였다. 그의 토지 제도 개혁과 신분제 확립은 이후 일본 사회에 안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농민 출신이라는 배경을 극복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 그의 인생 역정은 능력주의와 실력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근대 국가 건설의 선구자로 재평가받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전국적 조세 시스템, 통일된 법과 제도는 모두 근대 국가의 요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히데요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무자비한 정복자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조카를 포함한 가족까지 제거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센노 리큐의 강제 할복, 히데쓰구 일가의 몰살 등은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무엇보다 조선 침략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재앙적 전쟁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관점에서 히데요시는 침략자이자 전쟁 범죄자일 뿐이다. 현대 한국에서 임진왜란은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있으며, 히데요시는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일본 내에서도 전후 역사학계는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본 경제에 미친 악영향,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문화재 파괴 등이 주목받았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그의 신분 상승 스토리 자체에 있다. 그의 생애는 능력 있는 자라면 누구나 최고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정작 그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 신분 이동의 사다리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히데요시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약 280년간 일본에서는 농민이 무사가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전국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이 열어놓은 기회를 활용했지만, 그 기회의 문을 후대에게는 닫아버렸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히데요시를 분석하는 시도도 있다. 그의 출신 배경에서 오는 열등감이 과도한 과시욕과 정복욕으로 나타났다는 해석이다. 황금 다실, 거대한 성곽, 대륙 정복의 야망 등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심리적 보상 기제였을 수 있다. 말년의 편집증적 행동과 잔혹성도 권력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농민 출신이기에 권력의 정당성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잠재적 위협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를 단순히 선하거나 악한 인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전국시대라는 극단적 혼란이 만들어낸 산물이었고, 동시에 그 시대를 종식시킨 주역이었다. 만약 전국시대가 없었다면 농민의 아들이 천하인이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혼란이 기회를 창출했고, 히데요시는 그 기회를 완벽하게 포착했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안정된 질서는 동시에 후대의 기회를 박탈하는 억압 구조가 되었다. 이는 혁명가가 권력을 잡은 후 보수화되는 역사의 반복적 패턴을 보여준다. 히데요시의 생애를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출신과 정당성의 문제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낮은 출신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혈통을 위조하고, 천황의 권위를 빌리고, 화려한 문화를 후원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세우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력들이 그의 정당성 부족을 더욱 부각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훨씬 쉽게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었는데, 그는 명문 무사 가문 출신이었고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을 자처하며 쇼군이라는 전통적 무가의 최고 직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간파쿠라는 문관 최고직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쇼군이 될 수 있는 혈통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히데요시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의 시대적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16세기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당연시되던 시대였고, 유럽 열강들도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망은 당시 맥락에서는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침략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맥락 없이 현대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동시에 그의 업적 중 일부는 시대를 앞서간 것이기도 했다. 전국적인 토지 조사와 표준화된 조세 체계는 근대 국가의 특징이며, 상업 육성과 도시 개발은 경제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히데요시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역설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야망과 성취, 능력과 기회, 권력과 타락, 창조와 파괴가 한 인간의 생애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불가능으로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평화를 가져왔지만 전쟁도 일으켰다. 그는 문화를 후원했지만 예술가를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들이 히데요시를 단순한 영웅도 악당도 아닌, 복잡하고 입체적인 역사적 인물로 만든다. 농민의 아들에서 천하인으로 올라선 그의 여정은 인간의 야망과 능력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타락시킬 수 있는지도 증명한다. 히데요시의 생애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권력과 야망, 천재성과 오만함, 업적과 실패, 창조와 파괴가 복잡하게 얽힌 장대한 인간 드라마였다. 그가 죽은 지 4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의 이야기가 계속 연구되고 재해석되는 이유는, 그의 삶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영원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를 완전히 평가하지 못했고,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의 매력이자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