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미카와 지방의 오카자키 성에서 태어난 마츠다이라 타케치요라는 소년은 자신이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평화의 시대를 열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탄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전국시대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한 약소 가문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서막이었다.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는 강대한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였고,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것이 바로 어린 아들의 인질 생활이었다. 여섯 살의 타케치요가 오다 가문으로 보내지던 중, 호송을 맡았던 다구치 료순이 배신하여 소년을 이마가와 가문에 넘겨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거래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게임 말처럼 거래되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베던 1560년, 열일곱 살의 타케치요는 스루가의 순푸에 억류되어 있었다. 주군의 죽음은 그에게 해방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혼란 속에서 재빨리 미카와로 돌아와 독립을 선언했고, 이때부터 마츠다이라 모토노부, 그리고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질 생활은 이에야스에게 가혹한 교육이었다. 십 년 넘게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그는 생존의 기술을 배웠다. 이마가와 저택에서 그는 귀족적 교양과 무예를 익혔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본질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궁정에서 그는 거대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신하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자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요시모토의 과신과 오만은 결국 오케하자마에서의 파멸로 이어졌고, 이에야스는 이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말을 아끼는 법을 배웠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익혔으며, 무엇보다 기다리는 법을 체득했다. 그의 유명한 말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는 바로 이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일 그를 천하인으로 만든 인내심은 바로 이 암흑의 세월에서 단련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에야스의 성공을 계산된 전략의 산물로만 보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역경 속에서 형성된 불굴의 정신과,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학습 능력에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후 이에야스가 직면한 현실은 냉혹했다. 미카와는 강대국들 사이에 끼인 완충지대였고, 그의 세력은 언제든 집어삼켜질 수 있는 미약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내부의 위협도 처리해야 했다. 미카와 잇코잇키의 난은 그의 통치 초기를 뒤흔든 심각한 위기였다. 잇코 종파의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이에야스의 가신들 중 상당수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갈등했고, 일부는 아예 반란에 가담했다. 이에야스는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함도 불사했지만, 동시에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는 강경파를 제압한 뒤 온건파와는 타협하여 미카와를 안정시켰다. 이 경험은 그에게 종교 세력의 위험성과 통제의 필요성을 각인시켰고, 훗날 막부 체제 하에서 종교 통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이었다. 1562년 기요스 동맹으로 알려진 이 협약은 단순한 종속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이익에 기반한 전략적 파트너십이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진을 측면에서 지원했고, 특히 아자이-아사쿠라 전쟁과 나가시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츠요리의 기병대를 철포로 격파한 것은 노부나가의 전략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야스의 부대가 최전선에서 다케다 군을 묶어둔 것이 승리의 핵심이었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세력 확장의 여유를 주었고, 이에야스는 조용히 미카와, 토토미, 스루가를 장악하며 중견 다이묘로 성장했다. 이 동맹은 이십 년 가까이 유지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형성되었다. 물론 이 신뢰에는 냉정한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1582년, 혼노지의 변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교토에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배신당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사카이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겨우 삼십 명 정도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채 적대적인 영토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었다. 노부나가의 사망으로 권력 공백이 생기면 혼란이 예상되었고, 이에야스는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는 취약한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라면 절망했을 상황에서, 이에야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즉시 혼노지로 달려가 노부나가와 함께 죽는 것을 고려했지만, 가신 혼다 타다카츠가 이를 만류했다. "지금 죽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살아서 미카와로 돌아가 복수를 준비하십시오." 이에야스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가와 코가의 닌자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험난한 산길을 거쳐 미카와로 돌아왔다. 이른바 '이가고에'로 불리는 이 탈출은 그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도중에 그는 여러 차례 도적들의 습격을 받았고, 길을 잃어 고생했지만, 결국 무사히 오카자키에 도착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이가와 코가의 닌자들의 가치를 깨닫게 했고, 훗날 그는 이들을 자신의 정보 네트워크로 활용했다.
노부나가의 죽음 후 권력 공백은 곧 새로운 패권 경쟁으로 이어졌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놀라운 속도로 야마자키에서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부상하자, 이에야스는 미묘한 입장에 놓였다. 그는 신속하게 움직여 구 다케다 영지인 카이와 시나노를 장악했다. 이것은 합법적인 확장이라기보다는 혼란을 틈탄 기회주의적 행동이었지만, 전국시대에 그런 구분은 무의미했다. 문제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영지 재분배를 주도하면서 이에야스와 충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는 두 거인 간의 첫 번째 직접 대결이었다. 히데요시는 십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했고, 이에야스는 약 삼만의 병력으로 맞섰다.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에야스는 뛰어난 전술로 이를 극복했다. 그는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히데요시의 부장 이케다 츠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가 이끄는 별동대를 나가쿠테에서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전술적 승리는 히데요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두 사람은 화의를 맺었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굴종이 아니라 계산된 선택이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 불가피함을 인식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히데요시의 천하통일 사업에 협력하면서도, 자신의 영지와 독립성을 최대한 보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주군과 신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등한 동맹자에 가까웠다.
히데요시가 1590년 이에야스에게 관동 이전을 명령했을 때, 많은 가신들은 이를 좌천으로 받아들였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삼하(미카와, 토토미, 스루가)를 떠나 호조 가문의 구영토인 관동으로 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석고로 따지면 이백사십만 석으로 증가했지만, 관동은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지역이었고, 호조 가문의 잔당들이 남아있었다. 또한 에도는 당시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고, 성조차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것이 기회임을 간파했다. 관동 팔주는 넓고 비옥했으며, 개발 잠재력이 무궁무진했다. 무엇보다 교토와 오사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에도를 거점으로 삼아 체계적으로 개간과 치수 사업을 진행했다. 히라카와와 스미다강의 흐름을 조절하여 홍수를 막았고, 간척 사업으로 경작지를 확대했다. 그는 전국에서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에도를 근대적인 도시로 건설했다. 도로를 정비하고, 상수도를 설치했으며, 상업 지구를 조성했다. 이 시기 그가 쌓은 경제적, 행정적 기반은 훗날 에도 막부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그는 관동의 다이묘들을 재배치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공고히 했다. 후다이 다이묘들을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하고, 토자마 다이묘들은 주변부로 밀어냈다. 십 년 만에 에도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했고, 이에야스의 권력 기반은 그 어느 때보다 강고해졌다.
히데요시 말년의 조선 침략은 일본의 국력을 소진시켰고, 이에야스는 이 무모한 전쟁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나고야 성에 주둔하며 명목상의 총대장을 맡았을 뿐, 실제 도해는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전쟁에 직접 참여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그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관동 지역의 안정을 맡기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병참 지원을 담당하면서 형식적인 역할만 수행했고, 자신의 병력을 전쟁터에 소모시키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른 다이묘들이 조선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내정을 다졌다. 이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전쟁으로 소모된 다이묘들과 달리, 그는 온전한 병력과 재정을 보존할 수 있었다. 특히 서국의 다이묘들인 모리, 시마즈, 코니시, 카토 등은 전쟁의 최전선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이에야스는 오대로의 필두로서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위치에 섰다. 하지만 곧 그의 야심이 명확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이에야스에게 "도요토미 가문을 부탁한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이것을 자신이 천하를 장악할 기회로 해석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충실한 후견인을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권력 장악을 위한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해 갔다. 그는 오대로의 동료들과 오봉행의 관료들을 분열시켰다. 다른 다이묘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 것은 히데요시가 금지한 사항이었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무시하고 마에다, 다테, 후쿠시마 등의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영지를 재분배하며 자신에게 우호적인 다이묘들을 중요한 위치에 배치했다. 또한 후시미 성을 거점으로 삼아 교토와 오사카를 압박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히데요시의 충신들은 이에야스의 행보를 견제하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켰다. 미츠나리는 정직하고 유능한 관료였지만, 무장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반면 이에야스는 여러 무장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고, 그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했다.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하자, 이에야스를 견제할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일본은 점차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갔다. 동군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무단파 다이묘들이었고, 서군은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 관료들과 서국 다이묘들이었다. 1600년 초, 긴장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정벌하기 위해 동진하자, 미츠나리는 이것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거병하여 오사카 성의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이에야스를 역적으로 규정했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은 불가피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1600년 9월 15일 아침, 세키가하라 분지는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이에야스는 약 팔만에서 구만의 병력을 이끌었고, 서군도 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숫자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수개월에 걸친 정치공작으로 서군 내부에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츠키 모토츠나, 아카자 나오마사 등과 내통하여 그들의 배신을 약속받았다. 전투는 오전 8시경 시작되었다.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의 부대가 동군을 공격했고, 초반에는 서군이 우세했다. 특히 시마 사콘이 이끄는 부대는 동군의 선봉을 격파하며 이에야스의 본진을 위협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마츠다이라 산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 정오가 지나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움직였다. 그는 마츠오 산에서 내려와 서군의 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를 공격했다. 이 배신은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다른 내통자들도 일제히 서군을 공격했고, 서군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미츠나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몇 시간 만에 전투는 끝났고, 서군의 주요 장수들은 전사하거나 도주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며칠 후 체포되어 교토에서 처형되었고, 코니시 유키나가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수년에 걸쳐 정치적 공작을 펼쳤고, 적들 내부에 균열을 만들었으며, 결정적 순간에 그것을 활용했다. 세키가하라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이에야스의 전략적 천재성이 집약된 사건이었다.
세키가하라 이후 이에야스는 신중하게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그는 패자들의 영지를 대대적으로 몰수했다. 서군에 가담했던 팔십팔 명의 다이묘 중 대부분이 영지를 잃었고, 총 육백만 석 이상의 영지가 재분배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영지들을 자신의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되어 막부의 안보를 담당했고, 토자마 다이묘들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모든 패자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시마즈, 모리, 사타케 같은 대다이묘들은 영지가 축소되었지만 존속이 허용되었다. 이것은 전략적 판단이었다. 완전한 제거는 불필요한 반발을 야기할 수 있었고, 그들을 견제할 세력으로 남겨두는 것이 유용했다. 동시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오사카 성에 남겨두며 명분을 지켰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을 자처했다. 1603년 그는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고, 이로써 형식적으로도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605년 그는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양위하고 자신은 오고쇼(대어소)로 물러났다. 이것은 권력 이양이 아니라 세습 체제의 확립이었다. 그는 여전히 스루가의 순푸 성에서 실권을 행사했고, 히데타다는 명목상의 쇼군으로 에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문이라는 잠재적 위협을 제거해야 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의 히데요리가 성장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과 불만 세력이 모여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를 기다렸다.
1614년 방광종 사건은 이에야스가 기다리던 명분을 제공했다. 히데요리가 재건한 교토의 방광사 종에 새겨진 "국가안강 군신풍락"이라는 문구에서 '가강'이 이에야스(家康)를 저주하는 것이라는 트집이었다. 이것은 억지에 가까웠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구실로 삼아 오사카를 압박했다. 히데요리가 사과를 거부하자, 이에야스는 군사 동원을 시작했다. 1614년 겨울, 이십만에 가까운 막부군이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오사카 성에는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로닌들과 반막부 세력이 모여들었다.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 마타베, 모리 카츠나가, 후카모리 타다카츠 등의 명장들이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성에는 약 십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급조된 부대였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에야스는 외교와 무력을 병행했다. 그는 대포로 성을 포격하여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기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동시에 화의를 제안했다. 조건은 외곽 해자를 메운다는 것이었다. 요도기미는 화의를 받아들였고, 막부군은 신속하게 외곽 해자뿐 아니라 내곽 해자까지 메워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배신이었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1615년 여름, 그는 다시 군대를 동원했다. 이번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면전이었다. 히데요리는 성 밖으로 나와 결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모다 전투, 와키자카 전투를 거쳐 막부군은 오사카 성으로 밀고 들어왔다. 5월 8일, 성은 함락되었고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자결했다.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에야스의 권력에 도전할 세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평화의 건축가로서 이에야스가 만든 체제는 정교했다. 그는 단순히 무력으로 통일한 것이 아니라, 이백오십 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구조적 안정성을 설계했다. 그의 체제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세워졌다. 첫째는 다이묘 통제였다. 그는 다이묘들을 신푸다이(친번), 후다이(보대), 토자마(외양)로 구분했다. 신푸다이는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를 섬긴 가신들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주요 요충지와 에도 주변의 영지를 받았다. 후다이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가담한 다이묘들로, 막부의 중요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토자마는 세키가하라 이후 복종한 다이묘들로, 주변부에 배치되었고 막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하도록 배치되어, 어느 한 세력도 막부를 위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산킨코타이 제도는 이 통제 체제의 핵심이었다. 다이묘들은 격년으로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야 했고, 그들의 처자는 에도에 인질로 남아야 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쇼군에 대한 예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란을 예방하는 장치였다. 다이묘들은 오가는 데 막대한 비용을 써야 했고, 에도에 저택을 유지해야 했으며, 대규모 행렬을 꾸려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재정을 소진시켜 군사적 위협을 줄였다.
둘째는 법과 제도였다. 1615년 이에야스는 무가제법도를 공포했다. 이것은 다이묘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전으로, 성의 신축과 보수, 혼인, 영지 이동 등 모든 중요한 사항에 막부의 허가가 필요하도록 했다. 법은 간결했지만 포괄적이었고, 위반 시에는 가차없는 처벌이 뒤따랐다. 이에야스는 또한 사찰과 신사도 막부의 관리 하에 두었다. 그는 종파별로 본산 제도를 만들어 종교 조직을 체계화했고, 사찰 영지를 재분배하여 경제적 기반을 통제했다. 특히 잇코 종파와 크리스트교는 엄격히 탄압되었다. 이것은 종교가 정치적 도전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인질 시절 겪었던 미카와 잇코잇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셋째는 경제 통제였다. 그는 상업을 장려하되 상인 계급이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확립하여 상인들을 최하층에 두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경제 활동을 보호했다. 에도, 오사카, 교토는 막부 직할지로 두어 경제의 중심을 장악했고, 주요 광산과 항구도 직접 관리했다. 농민들은 토지에 묶여 쌀을 생산하는 존재로 고정되었다. 그들은 영지를 떠날 수 없었고, 무기를 소유할 수 없었으며, 세금의 중압 아래 살았다. 하지만 이것은 안정적인 세수와 식량 공급을 보장했다. 이 모든 제도는 전쟁의 재발을 막고 막부의 권력을 영속시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에야스는 또한 대외 관계에서도 신중했다. 그는 초기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허용했고,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의 확산이 막부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입장을 바꿨다. 1612년부터 그는 크리스트교 금교령을 내렸고,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었다. 크리스트교는 쇼군보다 신을 우선시했고, 다이묘와 농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이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역 자체는 유지하려 했고, 특히 중국과의 교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조선과도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쓰시마 번주를 통해 협상했고, 1607년 조선 통신사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막부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가장 큰 업적은 평화 그 자체였다. 백 년 넘게 계속된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칼이 아닌 법으로 다스리는 시대를 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초석을 놓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완성했다면, 이에야스는 평화를 제도화했다. 그의 체제 하에서 무사들은 전쟁터가 아니라 관청에서 일했고, 농민들은 약탈이 아니라 세금만 걱정하면 되었다. 상인들은 안전하게 전국을 오가며 장사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전란의 공포 없이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물론 이 평화는 억압적인 신분제와 강력한 통제를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자유는 제한되었고, 이동은 통제되었으며,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만한 대가였다. 전국시대를 겪은 세대에게 평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다.
1616년 1월, 이에야스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건강에 신경 써왔고, 약초학을 공부하여 스스로 약을 조제했으며, 매사냥과 수렵으로 몸을 단련했다. 하지만 칠십 넘은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앓은 병은 위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는 스루가의 순푸 성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그는 히데타다와 주요 가신들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고, 막부의 안정을 당부했다. 4월 17일,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임종 직전 그는 "나의 시신은 쿠노잔에 묻고, 장례는 조도지에서 치르며, 위패는 미카와의 다이주지에 두고, 일 년 후에는 닛코에 사당을 세워 관동의 수호신으로 모시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것은 마지막까지도 계산된 지시였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신격화되어 막부의 권위를 뒷받침하기를 원했다.
그의 죽음 후 그는 도쇼구에 신으로 모셔졌고, "동조대권현"이라는 신호를 받았다. 닛코의 도쇼구는 화려하게 건축되어 그를 신으로 기렸다. 이것은 단순한 신격화가 아니라, 그의 권위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였다. 도쿠가와 쇼군들은 정기적으로 닛코를 참배하며 시조에 대한 경의를 표했고, 이것은 막부의 정통성을 재확인하는 의례가 되었다. 그가 세운 막부는 그의 사후 이백오십 년 이상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전례 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에도 시대는 문화가 꽃피운 시절이었다. 우키요에, 가부키, 하이쿠 등의 예술이 발전했고, 서민 문화가 융성했다.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경제가 발달했다. 물론 이 시대에도 기근과 재난이 있었고, 신분제의 모순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안정과 질서의 시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는 인내와 전략의 승리를 보여준다. 오다 노부나가가 불꽃처럼 타올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류처럼 휩쓸고 지나갔다면, 이에야스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흐르는 큰 강과 같았다. 그는 기회를 만들기보다는 기다렸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계산했으며, 빠른 승리보다는 확실한 결과를 추구했다. 어린 시절의 인질 생활이 그에게 가르친 교훈은 명확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하고, 관찰해야 하며,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죽었고,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으로 국력을 소진했지만, 이에야스는 끝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그를 단순히 교활한 책략가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 이에야스는 깊은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고, 매사냥과 약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불교와 유교 경전을 탐독했다. 그는 출판을 장려하여 지식의 보급에 힘썼고, 학자들을 후원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했고, 부하들에게는 엄격했지만 공정했다. 미카와 무사들이 그를 따른 것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신뢰 때문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충성에는 충성으로 답했으며, 전장에서 부하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혼다 타다카츠, 사카이 타다츠구, 이이 나오마사 같은 명장들이 평생 그를 섬긴 것은 그가 섬길 가치가 있는 주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가족에 대해서는 냉정했다. 장남 노부야스를 자결시킨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단이었다.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심받자, 이에야스는 가문의 안전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켰다. 이것은 그의 냉혹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보여준다. 그는 개인의 감정보다 가문의 생존을 우선시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경우, 그의 승리는 단순히 전쟁에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화를 창조했고, 질서를 수립했으며, 후대에게 안정을 유산으로 남겼다. 물론 그의 체제는 억압적이었고, 신분제는 부당했으며, 쇄국 정책은 일본의 발전을 제한했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이백오십 년의 평화는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이에야스는 전국시대를 마감한 마지막 승자이자, 에도 시대를 연 위대한 건축가다. 그의 인내는 결국 보상받았고, 그가 기다린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인질로 태어나 신이 된 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그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로 남았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문화와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도의 거리는 도쿄가 되었고, 그가 건설한 도시는 세계 최대의 도시권으로 성장했다. 그가 세운 체제는 무너졌지만, 그가 추구한 안정과 질서의 가치는 여전히 일본 사회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