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무사도를 둘러싼 신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젊다. 칼을 든 사무라이가 주군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할복을 택하는 그 장엄한 이미지는 사실 20세기 초에 완성된 발명품에 가깝다. 진짜 역사 속 무사들의 모습은 이와 사뭇 달랐다. 무사도라는 개념 자체가 사무라이가 한창이던 13~16세기 문헌에서는 쓰인 적조차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도는 후세에 의해 굳어진 것이고, 더 정확히는 근대 일본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재창조한 산물이다.
사무라이라는 말의 어원은 '모시다'를 뜻하는 고대 일본어 동사 '사부라우'에서 나왔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주군의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중하급 기능직 관인을 가리켰다. 초기에는 부시뿐 아니라 법관이나 음양사 같은 관리도 모두 사무라이라 불렸고, 굳이 무인이라는 특정 직책만을 지목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귀족과 연줄이 있는 국가 레벨 지배계층의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실무자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조정의 국사 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가업으로 계승했으며, 오직 시간이 흐르면서 무예를 직능으로 삼는 이들을 특별히 사무라이라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 지위와 상관없이 군사 관련 직능을 가진 자, 즉 부시 전반을 사무라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에도 시대의 일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층이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귀족이나 사사도 각자의 장원 내에서 병사역으로서 무사를 징발하여 경비와 숙직에 충당했으며, 이런 무사는 사무라이라고 불리었고 귀족층으로부터는 신분적으로 비하당하는 존재였다. 이 시기의 사무라이는 상층 귀족들의 시종이자 경호원에 불과했고, 그들의 무력은 도구일 뿐 권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헤이안 말기의 혼란 속에서 상황은 급변했다. 사회문제 악화로 인한 반란 및 사원의 강소 등을 진압하기 위해 황손이었던 무사 씨족들이 중용되었고, 이들이 후에 무가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인 고케닌을 통해 통치했으며, 쇼군은 고케닌에게 영지 소유권을 안도라는 형식으로 인정하거나 새로운 영지를 하사하는 대신, 고케닌은 전투 참가와 경호, 정치기구의 관료로서 막부 정치에 참여하는 의무를 다하였다. 쇼군과 고케닌의 관계는 자기 이익의 보정과 확장을 위해 맺어진 인위적이면서 공식적인 주종관계, 즉 계약관계였다. 이것은 무조건적 충성이 아니라 상호 이익에 기반한 실용적 결합이었다. 막부는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제를 통해 무사들을 조직했지만, 이는 서구의 기사도와 달리 계약의 성격이 강했다. 무공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충성도 보장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주군에 대한 충성과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정신이 배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협상 가능한 원칙이었다.
전국시대로 접어들면 사정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무로마치 막부 아래에서 성장한 이들이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났으며, 능력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한 다이묘들도 많았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풍조 하에서 능력있는 가신들이 봉건 영주들을 무너뜨리는 하극상 현상이 1493년 호조 소운이 이즈를 탈취한 것에서 시작되어 센고쿠 시대 동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다이묘들은 양판소 영지물이나 게임처럼 자기 독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지역 유력자들이나 가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이들과의 합의나 협조 없이는 영지를 운영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거나 심지어 하극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다케다 신겐이나 모리 모토나리 같은 유명 다이묘조차 이 '지역 연합 맹주'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전국시대에는 토도 다카토라처럼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 등이 일상다반사였다. 흔히 퍼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는 전국시대 무사의 실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주는 만큼 확실히 일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용병이나 오늘날 직장인처럼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국시대 무사들은 주군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처우가 불만스러우면 주저 없이 다른 주군을 찾아 떠났다. 배신과 하극상이 일상이었던 시대에 무조건적인 충성은 오히려 어리석음의 표시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보듯, 전쟁 도중에도 진영을 바꾸는 일이 흔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항왜들은 조선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단순히 다른 주군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일본에는 국가 정체성이 거의 없었고, 무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충의가 아니라 생존과 실리였다.
물론 모든 무사가 기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무사도의 덕목으로써 한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친 무사는 '후다이'라고 해서 가문의 측근 중신으로 중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성도 계약적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주군이 가신을 잘 대우하면 가신도 충성으로 보답하는 상호적 관계였지,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었다. 전국시대 무사들은 생존을 위해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했으며, 필요하다면 비열한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사이토 도산이나 마츠나가 히사히데처럼 모반으로 주군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올라앉는 것이 비난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였다. 명예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충성보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거의 300년간 외부 전쟁이나 다이묘 간 전쟁을 방지하면서, 사무라이는 일정 수준의 유학 지식을 갖춘 집단으로 변화했다. 전쟁이 사라진 시대에 사무라이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라 관료이자 지배계급이 되었다. 칼은 계급의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칼싸움을 하면 당사자 모두 참수형이었기에 칼날 부분을 대나무로 만든 다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잦았다. 이때 유교적 이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충과 의를 강조하는 새로운 무사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에도 막부는 사무라이들을 충성스럽게 만들 이념적 도구가 필요했고, 성리학이 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 역설을 품고 있었다. 유교의 논리를 따르자면 진정한 충성의 대상은 쇼군이 아니라 천황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하급 사무라이 야마모토 쓰네토모가 구술하고 다시로 쓰라모토가 기록한 하가쿠레는 "무사도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실현된다"고 선언한다. 이 책은 에도 시대 사무라이 철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오히려 금서에 가까웠다. 에도 막부와 다이묘들은 하가쿠레를 꺼렸는데, 그 내용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경우 사적인 결투나 복수가 횡행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시대에 죽음을 찬양하는 무사도는 사회 질서에 위협이었다. 더구나 하가쿠레가 논하는 무사도는 전란기의 산물이었기에 에도 시대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평화의 시대에 무사들은 관료로서의 유교적 덕목을 배워야 했지, 죽음의 미학을 탐닉할 이유가 없었다.
진짜 전환점은 메이지 시대에 찾아온다. 1900년 니토베 이나조가 영어로 집필한 '무사도: 일본의 혼'은 서양인 친구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서양에서는 종교가 도덕교육의 기반인데, 일본은 무엇으로 도덕을 가르치느냐는 물음에 니토베는 무사도를 답으로 제시했다. 영어로 쓰인 이 책은 미국과 유럽에서 먼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서구에 컴플렉스를 가진 일본 지배층이 이를 역수입해 국민도덕으로 만들었다. 다카하시 마사아키 교수가 지적하듯, 니토베의 무사도는 부분적인 사실과 습관, 논리의 단편을 모아 머릿속 무사 상을 부풀려 만든 일종의 창작이었다. 니토베는 서양의 기사도에 영향받아 역사적 사실에 애국심을 뒤섞어 무사도를 재구성했고, 이것이 20세기 일본인이 생각하는 무사도의 표준이 되었다.
무사도라는 단어 자체가 사무라이가 한창이던 13~16세기 문헌에서는 쓰인 적이 없다. 무사로서의 이상적인 자세에 관한 글은 있었지만, 무사도라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은 후세에 의해 굳어진 것이다. 진정한 사무라이라면 주군의 잘못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진짜 전통이었으며, 죽음의 순간까지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통이다. 역사적 무사들은 주군이 무능하거나 부당하면 간언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났다. 맹목적 복종은 무사의 덕목이 아니라 노예의 처지였다.
군국주의 일본은 이 조작된 전통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일본군 수뇌부는 병사들을 사무라이의 후예라고 합리화하며 여러 막장 행위를 강요했지만, 정작 그들은 무사도가 없는 명예마저 씹어먹는 집단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과 가미카제 특공은 무사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지만, 원래 일본 무사 중 주류였던 이들은 싸워서 이득이 없는 상황에서 항복하는 것이 비난받을 태도가 아니었다. 전국시대 무사들은 패배가 명백하면 협상했고, 조건이 괜찮으면 항복했다.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하는 것은 무사도가 아니라 그것을 왜곡한 전체주의였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무사가 아니라 파시즘의 희생자였다.
역사적 진실은 명확하다. 무사도는 단일한 전통이 아니라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재구성된 개념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계약적 주종관계, 전국시대의 실용주의, 에도 시대의 유교적 충의,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국가주의적 무사도는 모두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무사도는 주로 마지막 버전, 즉 근대 일본이 제국주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것은 진정한 역사보다는 서구 열강에 맞서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신화에 가깝다.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회는 과거를 재해석하며 현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 많은 국가가 자국의 역사적 전통을 미화하고 재발명해왔다. 프랑스의 기사도는 19세기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것이고, 영국의 아서왕 전설도 빅토리아 시대에 재포장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고, 더 나아가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때 발생한다. 일본의 무사도가 정확히 그런 경로를 밟았다. 니토베가 창조한 무사도는 처음에는 무해한 문화적 자긍심이었지만, 군국주의 시대에 살인 기계를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무사들의 실제 모습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웠고,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주군을 바꿨으며, 평화가 찾아오면 칼을 내려놓고 관료가 되었다. 명예와 충성도 중요했지만, 그것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헤이안 시대의 사무라이는 귀족의 경호원이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토지와 보상을 바라는 계약 무사였으며, 전국시대에는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용병에 가까웠고, 에도 시대에는 칼을 찬 문관이었다. 이들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으로 미화하는 것은 역사의 풍부한 결을 지우고 단순한 신화로 환원하는 일이다.
무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역설적이다. 진짜 무사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묻기보다, 왜 사람들이 특정 시점에 특정한 무사도를 필요로 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메이지 일본은 서구 열강에 맞서기 위해 국민을 결속시킬 정신적 기둥이 필요했고, 무사도가 그 역할을 했다. 군국주의 일본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사도를 더욱 극단적으로 왜곡했다. 오늘날 무사도가 다시 주목받는 것도 현대 일본 사회가 직면한 정체성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며 자신감을 잃은 일본인들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소환하고 싶어 한다.
역사는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무사도를 둘러싼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학술적 관심사가 아니라 일본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현재진행형 질문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신화를 벗겨내고 역사의 복잡성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무사들이 실제로 가졌던 것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 감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무사도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진정한 무사의 덕목은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며 자신과 가문을 지키는 실용적 지혜였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2%AC%EB%AC%B4%EB%9D%BC%EC%9D%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