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7월 8일,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흑선이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에도만의 어부들은 공포에 떨었다. 증기선은 일본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물이었다. 바람이 없어도 움직이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거대한 포문을 드러낸 이 철제 함선들은 일본의 평화로운 고립을 산산조각 냈다. 그러나 진정한 충격은 기술적 경이로움이 아니라 정치적 굴욕에서 왔다.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며 200년 넘게 지속된 쇄국 정책을 포기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 후, 이 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경험하며 근대 국가로의 길을 열었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정권 교체나 정치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한 문명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 스스로를 근본부터 재구성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는 외부의 정복이나 혁명적 봉기가 아닌,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시작된 자기 변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도쿠가와 막부의 쇠퇴는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가시화되고 있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이 체제는 250년 이상 전례 없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그 평화 자체가 역설적으로 체제의 모순을 키웠다. 무사들은 싸울 전쟁이 없었다. 칼을 차고 다니며 무예를 연마했지만, 그들의 전투 기술은 점차 의례적 형식으로 변질되었다. 한편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쌀을 기반으로 한 봉건적 수취 체계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번들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에도, 오사카, 교토의 상인들에게 끊임없이 빚을 졌다. 무사들의 실질 소득은 18세기 동안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많은 하급 무사들은 부업으로 우산을 만들거나 제등을 엮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 상인 계급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질서의 최하층에 묶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1837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은 이러한 모순의 징후였다. 막부의 관리였던 오시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라며 봉기한 사건은, 체제 내부의 양심적 인사조차 더 이상 막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내부적 모순은 외부 충격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체제 변화를 촉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페리의 내항은 이 느린 붕괴 과정을 폭발적으로 가속화했다.
페리의 내항이 초래한 위기는 단순히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막부의 정당성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한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일본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무력이었다. 그러나 막부는 서구 열강 앞에서 무력했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막부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조약 체결 전에 천황의 칙허를 구한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천황은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막부는 천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260년간 형식적 존재에 머물던 천황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쫓아내자"는 이 구호는 단순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정으로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의미였다. 1862년 사쓰마 번사들이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 1863년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외국 선박을 포격한 사건 등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곧 현실을 깨달았다. 보복으로 사쓰마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고, 조슈는 네 나라 연합 함대의 공격으로 완전히 굴복했다. 양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존왕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그것은 막부 타도의 명분으로 재해석되었다. 천황을 받든다는 것은 더 이상 천황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황의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든다는 뜻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은 체제의 정점에 있던 자들이 아니었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같은 서남 번들은 에도 시대 내내 도쿠가와의 통제 아래 있던 외양 다이묘들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이후 도쿠가와에 복속한 이들은 260년 동안 중앙 정치에서 배제되어 왔다. 막부의 중요 직책은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즉 도쿠가와의 오랜 가신들이 독점했다. 외양 다이묘들은 주변부에 머물렀고, 바로 그 주변부성이 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체제 내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기에, 체제 자체를 바꾸려는 동기가 강했다. 특히 사쓰마와 조슈는 지리적으로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19세기 초반부터 자체적인 경제 개혁과 군사력 강화를 추진해왔다. 사쓰마는 류큐와의 무역으로, 조슈는 시모노세키 해협의 통행료와 밀무역으로 재정을 충실히 했다. 이들은 서구의 군사 기술에도 관심이 깊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참패한 소식은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서남 번들은 서구식 무기와 훈련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사쓰마는 1850년대부터 반사로(反射爐)를 건설해 대포를 주조했고, 조슈는 서구식 군사 훈련을 도입했다. 그러나 진정한 교훈은 실전을 통해 얻어졌다. 1863년 사쓰에이 전쟁에서 사쓰마는 영국 함대의 암스트롱 포가 자신들의 성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것을 목격했다.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조슈는 네 나라 연합 함대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이 두 번의 참패는 역설적으로 이들을 가장 현실적인 개혁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깨달았다. 양이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며,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일본의 독립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1866년 사쓰마와 조슈는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사쓰조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막부 타도의 결정적 군사력이 되었다.
1868년 1월 3일 새벽, 교토 어소(御所)에서 역사적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었다. "천황이 다시 친정한다"는 이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고대로의 복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례 없는 새로운 체제의 시작이었다. 천황은 수백 년 동안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 조정은 의례와 문화의 중심이었지 권력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황이 직접 통치한다? 이것은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정치적 허구였다. 당시 16세였던 메이지 천황은 이 과정에서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실제 권력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 도사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하급 무사 출신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천황의 권위를 명분으로 삼아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막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구 막부 세력과 신정부 사이에 보신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발발했다.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신정부군은 서구식 무기와 훈련으로 무장한 반면, 막부군은 여전히 구식 전술과 무기에 의존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성을 평화롭게 명도했지만, 북부와 홋카이도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1869년 5월 하코다테의 고료카쿠 요새가 함락되면서 보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신정부는 진정한 도전에 직면했다. 어떻게 분열된 봉건 국가를 통일된 근대 국가로 변모시킬 것인가? 어떻게 서구 열강과 대등한 힘을 갖출 것인가?
신정부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었고, 동시에 전략적으로 신중했다. 첫 단계는 권력 집중이었다. 1869년 6월, 신정부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선포했다. 모든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版)와 백성(籍)을 천황에게 반환해야 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다이묘는 순순히 응했다. 왜인가? 그들은 실제 권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반환 후에도 여전히 번의 지사로 임명되어 통치를 계속할 수 있었고, 녹봉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일단 법적 소유권을 포기하면, 다음 조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2년 후인 1871년 8월, 신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했다. 276개의 번이 완전히 폐지되고,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3부 302현 체제가 수립되었다. 다이묘들은 도쿄로 강제 이주 당했고, 지방의 실질적 권력은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리들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1185년 가마쿠라 막부 이래 700년 가까이 지속된 일본의 분권적 봉건 체제를 단 4년 만에 해체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봉건 영주들의 권한이 왕권으로 흡수되는 데 수세기가 걸렸고, 독일이 통일 국가가 되는 데 1871년까지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변화의 속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대규모 폭력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사쓰마와 조슈의 군사력이 배경에 있었지만,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최소화되었다. 다이묘들은 녹봉을 받으며 도쿄에서 한직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재정 부담은 이제 국가가 떠안았다.
사회 구조의 변화는 더욱 근본적이었다. 1869년 신분제 개혁으로 수백 년간 일본 사회를 지배해온 사농공상의 엄격한 구분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무사, 농민, 상인, 장인이라는 네 개의 신분은 화족(華族), 사족(士族), 평민(平民)이라는 세 개의 새로운 범주로 재편되었다. 화족은 구 귀족과 다이묘들로 구성되었고, 사족은 약 190만 명의 무사 계급을, 평민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포함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화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신분의 세습성이 약화되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며, 무엇보다 농민과 상인이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얻었다. 1871년에는 더욱 상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사족에게만 허용되었던 대도(大刀)와 소도(小刀)를 함께 차는 다이쇼(大小) 착용이 금지되었다. 칼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무사 계급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무사는 칼을 차고 농민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에도 시대 사회 질서의 핵심이었다. 1876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칼을 차는 것 자체가 완전히 금지되었다(폐도령, 廢刀令). 경찰과 군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칼을 착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수세기 동안 일본 사회를 지배해온 전사 계급의 특권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는 선언이었다. 같은 해 녹봉(祿俸) 제도가 폐지되었다. 무사들에게 대대로 지급되던 쌀 봉급이 일시금으로 대체되었다. 평균적으로 5-7년치 녹봉에 해당하는 금액이 공채로 지급되었지만, 이것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었다. 약 190만 명에 달하는 사족 전체의 경제적 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라고 권장했지만, 수백 年 동안 노동을 천시해온 계층에게 이것은 정체성의 말살과 다름없었다. 많은 사족들은 받은 금액을 무모한 사업에 투자했다가 잃었고,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다. 일부는 인력거꾼이나 경찰이 되었고, 일부는 홋카이도 개척에 참여했지만, 대다수는 몰락했다. 신정부는 이러한 불만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재정적으로 190만 명의 특권층을 계속 부양할 수는 없었다.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면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계층에 대한 지출을 중단해야 했다.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당연히 격렬한 저항을 불렀다. 1874년 사가의 난, 1876년 구마모토의 신푸렌의 난, 1876년 아키즈키의 난 등 무사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두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그리고 1877년,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세이난 전쟁이었다. 사이고는 사쓰마 출신으로 보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고, 메이지 유신의 삼걸(三傑)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873년 정한론(征韓論) 논쟁에서 패배한 후 정부를 떠나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그는 급진적 서구화에 반대했고, 무사 계급의 가치를 지키려 했다. 1877년 1월, 사쓰마의 불만 사족들이 사이고를 중심으로 봉기했다. 약 4만 명의 사족 군대가 정부군과 맞섰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했고, 검술과 창술에 능숙했다. 반면 정부군은 징병제로 모집된 농민 출신 병사들이 주축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훈련받은 전사 계층이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전쟁은 8개월간 지속되며 반란군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정부군은 약 6만 명이 동원되었고, 서구식 소총, 대포, 해군의 지원을 받았다. 무사들의 칼과 창은 근대적 화기 앞에서 무력했다. 1877년 9월 24일,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이고는 부하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이 전쟁은 단순한 반란 진압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컸다. 그것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충돌이었고, 전통적 무사도의 종언이었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명예로운 전사들이 총과 대포로 무장한 농민 출신 징집병들에게 패배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기술과 조직이 전쟁을 결정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세이난 전쟁 이후 무사 계급의 저항은 완전히 소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의 변화는 더욱 철저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872년 학제(學制)가 반포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적 의무 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마을에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집에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선언은 교육을 신분의 특권이 아닌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재정의했다. 전국이 8개 대학구, 각 대학구는 32개 중학구, 각 중학구는 210개 소학구로 나뉘어, 이론상 전국에 5만 3천여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어야 했다. 물론 이것은 즉시 달성되지 않았다. 실제로 1875년까지 약 2만 4천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취학률은 35%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렸다. 아이들은 중요한 노동력이었고, 학비와 교재비는 부담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농민들은 읽고 쓰기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 건물을 불태우는 반대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886년 소학교령이 반포되면서 4년간의 의무 교육이 확립되었고, 1900년에는 수업료가 면제되었다. 그 결과 1900년경 취학률은 90%를 넘어섰다. 이것은 놀라운 성취였다. 같은 시기 청나라의 문자 해독률이 5% 미만이었고, 인도는 영국 식민 통치 하에서도 문맹률이 90%를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의 교육 혁명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학교에서는 서구식 교육 내용이 도입되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리, 역사가 체계적으로 가르쳐졌다. 일본어 문법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었고, 표준어가 정립되었다. 이는 단순히 지식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프로젝트였다. 번마다 달랐던 방언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이제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고, 공통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일본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형성했다. 1890년 교육칙어가 반포되면서 교육은 더욱 국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충효, 우애, 공공정신 같은 유교적 덕목과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었다.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곳일 뿐 아니라, 천황제 국가의 신민을 양성하는 곳이 되었다.
1871년 11월부터 1873년 9월까지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끈 사절단의 서구 순방은 메이지 지도자들의 학습 의지와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사절단에는 이와쿠라 외에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의 핵심 인사 절반 가까이가 포함되었고, 약 60명의 유학생도 동행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시작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까지 12개국을 방문했다. 원래 목적은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위한 예비 교섭이었지만, 서구 열강은 일본이 아직 "문명국"이 아니라며 협상을 거부했다. 이 굴욕적 경험은 역설적으로 사절단에게 더 중요한 임무를 부여했다. 서구 문명을 철저히 학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회, 법원, 학교, 공장, 철도, 전신, 우체국, 병원, 박물관, 도서관을 방문했다. 군함, 무기 공장, 철강소를 시찰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정치가와 기업가를 만나 대화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히 선진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가능하게 한 제도와 문화였다. 영국의 산업 혁명, 프랑스의 법률 체계, 독일의 교육 제도, 미국의 헌법 구조를 관찰하며 그들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서구의 힘은 개별 기술이 아니라 체계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사절단의 경험은 일본 근대화의 청사진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헌법을 연구하여 메이지 헌법의 기초를 만들었다. 독일 모델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의회민주주의는 군주의 권한을 제한했지만, 프로이센-독일 모델은 강력한 군주제와 근대적 헌법을 결합했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법률 체계는 프랑스 나폴레옹 법전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해군은 영국식으로, 육군은 처음에는 프랑스식이었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후 독일식으로 전환했다. 교육 제도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 독일식 대학 모델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선택적 수용은 무분별한 서구화가 아니라 전략적 실용주의였다. 각 분야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해 보이는 모델을 골라 일본의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표현처럼, "화혼양재(和魂洋才)" - 일본의 정신에 서구의 기술을 결합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신과 기술을 분리할 수 없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A9%94%EC%9D%B4%EC%A7%80%20%EC%9C%A0%EC%8B%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