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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영 Apr 17. 2023

꽃잎조차 무거운

한국산문 2023. 2월호 발표

 

  “그러게요. 밤새 안녕이라더니···.”

  부스스 눈 뜬 아침, 습관처럼 펼친 핸드폰에 띄워진 수수밭 작가들의 메시지. 서울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다. TV를 켜니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인파에 밀려 대규모 압착 성 질식사를 당했고 부상자가 많이 나오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언어로도 아픔을 표현하기 어려운, 인생의 꽃을 채 피워보지 못한 20대가 대부분이다. 그야말로 재난영화 속 아비규환의 현장이 서울 대로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이 2022년 10월의 대한민국 현실이란 말인가. 순간 뒷머리를 맞은 듯 아찔했다.     



  잠시 마음을 진정하며 창밖을 내다본다. 한껏 높아진 하늘과 유난히 하얀 구름, 가을을 알리는 소슬바람. 자연은 세상일과 상관없이 그저 쏟아지는 햇살에 빛나고 있을 뿐이다. 고고한 하늘은 드높아서 발아래 깔린 억울한 죽음과는 상관없다는 듯 푸르르다. 이렇게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데 미동도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 야속하기만 하다.

  갑갑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얼마 전 시작한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 둑길을 따라 달린다. 빨갛게 성이 난 가을은 제풀에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비어 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저녁 바람이 스산하게 드나든다. 억장이 무너지는 세상사야 알 바 아니라는 듯 유유자적 흐르는 강물을 보며 오늘의 일이 그저 흘러가 버리지 않기를, 섬이 된 자식을 품고 살 부모의 가슴에 풀줄기 하나는 자랄 수 있기를 바라며 유달리 무거운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듯 시간이 흐른다. 참사가 일어나고 며칠이 지났다.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가 줄을 잇는다. 어느 죽음이 억울하지 않겠냐만 사연 하나가 눈길을 끈다. 깡마른 체구에 살아 있는 기운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중년 남성이 돌아오지 않는 딸의 침대에 앉아 있다. 오래전 혼자된 아버지가 외로울까 봐 얼마 전 딸이 데려온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놓을 줄 모른다. 

  “좋은 날에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 남매 기죽지 않게 올바르게 키우려고 아빠 혼자 고생 많이 하신 거 다 알아요.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내 옆에 딱 70년만 더 있어 주세요.”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홀로 남매를 키워왔던 아버지에게 본인의 생일날 보낸 문자 내용이다. 3년 전 골수암으로 불리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의사 앞에서 단호하게 자기 골수를 이식하겠다 말하던 딸을 떠올린다. 그 덕분에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아버지는 자식의 황망한 죽음 앞에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연신 가슴을 치며 울먹였다.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은, 영영 못 만나게 될 줄은 꿈결에도 몰랐는데 이제 아버지는 딸의 체취가 밴 옷을 차마 세탁하지 못한 채 곱게 개어놓고, 여식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라도 딸을 느끼고 싶다.     




  가슴 먹먹한 사연은 이뿐 아니다. 장례식장에는 이십 대에 고인이 된 자식의 이름 아래 부모가 상주로 올라 있다. 영정 사진 속 앳된 얼굴에 조문객들은 차마 위로조차 건네기 어렵다. 그저 함께 눈물을 흘릴 뿐이다. 159명의 희생자 중 대부분이 부모의 배웅을 받고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되었다. 

  기사문과 인터넷을 떠도는 영상에 달린 추모의 글 사이로 놀러 다니다 당한 일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댓글이 보인다. 희생자 가족들은 이 말이 더할 수 없이 아프다. 소박하든 거창하든 그들만의 꿈을 꾸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아들이고 딸이다. 자식을 잃은 이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살을 뚫는 고통으로 남는 말이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세금으로 위로금과 장례비를 지급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함을 체감한다. 마음속에 소슬한 바람이 인다.      




  스산한 마음에 책이라도 읽어볼라치면 좁은 골목에 갇혀 한 덩어리가 된 청년들의 팔이 글자를 휘젓는다. 책장을 덮고 마음이 복잡할 때 찾게 되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펼친다. 초등학생 때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거무죽죽하던 속이 말갛게 씻겨나가곤 한다. 누구랑 놀아서 즐거웠다, 무엇을 해서 재밌었다, 다음에 또 놀고 싶다 온통 놀아서 좋았던 날이다. 아이도 어른도 놀고 싶다. 재밌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 


  아는 언니가 연달아 점심 약속으로 외출이 잦아지자 시어머님이 한 말씀하셨다. “넌, 여편네여. 여편네가 집안은 안 돌보고 나가 돌아다니면 쓰겄냐?” “어머니, 저도 놀고 싶단 말이에요.” 하며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이자 “그랴아, 놀아.” 하더란다. 놀고 싶은 건 팔순 넘은 시어머니도 이해하는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어디 인간만 그러하랴. 인연이 닿아 키우게 된 고양이도 늘 놀아달라고, 같이 놀자고 야옹거린다. 귀찮아서 요구에 응하지 않는 날은 어김없이 토라져 침대 뒤 작은 공간에 숨어 종일 코빼기도 볼 수 없다. 이뿐인가,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물고기들이 강물에서 뛰어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서 하얀 배를 반짝이며 뜀박질이다. 왜 저럴까? 하는 질문에 남편은 노는 중이라고 답한다. 과학적으로 정말 그런지는 모른다. 놀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 담긴 것만은 분명하다.     




  세월이 가니 놀이문화도 변화 일색이다. 우리 때만 해도 크리스마스 캐럴에 심장 쿵쾅거리며 괜히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한껏 들뜬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은 “남의 생일에 왜 니들이 난리고?” 했다. 요즘은 핼러윈 축제가 젊은이들 사이에 이벤트다.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잔치다. 우리 아파트도 이번에 아이들을 위해 작은 축제를 계획했는데 참사를 맞아 준비한 사탕과 쿠키만 조용히 나누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실 나도 ‘남의 귀신 놀이에 왜 난리지?’하는 꼰대가 되었다. 내 심장이 캐럴 소리에 뜨거웠듯 요즘 세대들은 핼러윈 분장에 열정이 돋는다. 흥이 차오른다. 조선 시대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 뛰고, 씨름하듯 요즘은 그런 놀이문화다.


  이곳 부산 중구 남포동에도 12월이면 트리 축제가 펼쳐진다. 화려한 조명으로 꾸며진 트리 사이를 걷노라면 절로 함박웃음이 터진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 하루쯤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고 싶은 시민들이 몰려나온다. 놀고 싶은 마음이 거리를 꽉꽉 메운다. 날마다 이벤트처럼 살지 않는다. 어쩌다 그런 날 하루다. 그런 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유족들의 시간은 여전히 10월의 마지막 날에 멈춰 있다. 가족을 잃기 전과 잃은 후로 나뉜 시간의 경계에서 애끓고 억울한 마음을 소리쳐 본다.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와 진심이 담긴 사과를 원한다. 

  사과는 미안함의 무게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알아야 미안함을 느낀다. 사과를 이기고 지는 승부의 문제로 생각하면 주변에 사람을 두기 어렵다. 사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미안하다는 말은 용기가 필요하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사과할 용기를 내는 것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하는 마음일 것이다.      


  꽃잎조차 무거워 올려놓기 미안한 청춘들의 죽음 앞에 글 한 편 남기지 않고는 이 계절을 보내지 못할 것 같다.               


                                                                   꽃이 진다. 







#이태원참사#핼러윈#축제#세월호#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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