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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아름답지 못한 남자

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5

by 임선민

합의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반갑지 않은 연락이 왔다. 그대로 끝일줄 알았는데.

"잠깐 연락 가능할까?"


"다른 게 아니고, 그냥 바로 용건 말할게. 내가 준 돈 중에 반이라도 좀 다시 줄 수 없나 해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난 이걸 위자료로 받은 거고, 돌려줄 생각 없다고 했더니 위자료라고 해도 내가 받은 게 많은 금액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넌 이게 많다고 생각해? 아니 못 줘. 나 이거 가지고 공부할 거야."


나랑 장난하는 건가? 난 너희가 그 짓거리할 때 너만 믿고 둘이 잘 살아보려고 직장도 그만뒀는데. 그는 나의 퇴사가 온전히 자기 책임이냐고, 자기 없어도 할 공부가 아니었냐고 한다. 끝까지 뻔뻔한 모습이었다. 물론 내 선택이었지만 그 결정에 본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현재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날 응원한다고 내게 용기를 줬던 그 남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구나.


"나도 돈만 많으면 얼마든지 더 보상해주고 싶어. 근데 그거 나한테도 엄청 큰돈이잖아. 내가 준 돈에서 3천 정도만 다시 줄 수 없어? 내 전 재산이었잖아, 알다시피 나 있는 것도 없고."

합의금을 포함해서 내가 받은 돈이 1억이 넘는다며자기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한다. 그래, 아무래도 그 여자랑 새로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왜 이제 와 생각해 보니까 너무 아깝냐고 물었더니 그는 구차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차에 시동도 잘 안 걸린다면서. 그의 차는 중고 suv다. 그 추운 강원도에서 시동이 안 걸릴 만도 하지. 새 차를 사서 그 여자애랑 놀러 다닐 생각인가 보다.


“열심히 벌어. 너 돈 잘 벌잖아.”

이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가 받는 월급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현재는 자기도 기껏해야 나랏밥 먹지 않냐고, 그것도 매일 기도하고 목숨 걸고 비행하면서 버는 거라고 했다. 쉽지 않게 번 돈 나랑 잘 살아보려고 합치자고 했던 거였고,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돈이 아니란다. 그걸 벌기 위해 기도하고 목숨 걸고 비행했을지는 몰라도 내 인생은 배신으로 속여놓고 이혼하고 그 여자랑 행복하기 위해 맞바꾼 돈이겠지. 그런 말은 나한테 할 게 아니고 그 여자가 알아줘야 할 문제 같은데. 아마 큰 감동 받을거야.


그러고는 나랑 만나면서 데이트 비용도 다 냈고, 내 전세금 이자가 많이 나가서 결혼 전에 자기가 안 보내도 되는 돈, 같이 모아보자고 보내 준 게 아니냔다. 얼씨구. 이젠 데이트 비용 언급까지?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찌질해질 줄은 몰랐다.

"내가 전세금 보태달라고 했어?"

"너 말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래 네가 보내달라고 안 했어. 그럼 다시 주면 되겠네."

내가 이 돈을 어떤 위자료로 받은 건지 그는 며칠 사이에 잊은 모양이다.


정 받고 싶으면 소송을 걸라고 했다. 그랬더니 소송하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가 얼마나 나올 것 같냐고 이젠 날 반 협박까지 했다. 좋아 그럼 갈 데까지 가보자. 내가 아무것도 못 할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렇게 나온다면 내 처음 플랜대로 갈 수밖에 없다. 이 둘의 사이를 묵인해 준 군대 내 사람들까지 싹 다 엮어서 같이 찌를 생각이었다.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 동조한 것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럼 둘만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니니 부대가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다.


"네가 나한테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 봐. 다 끝난 얘기 가지고 이렇게 다시 쑤셔대면 내 입장에서는 날 죽으라고 밀어 넣는 것과 같은 거고, 그런 너 내가 행복까지 못 빌어주게 하지 마라. 넌 내가 겪고 있는 하루가 어떤지 모르지? 네가 준 위자료가 많다고? 그럼 많은 건지 한번 건드려봐. 내 인생 망친 거 죽어서라도 갚아 줄게. 너 이게 끝인 것 같지? 이 끝이 어디인지 한번 가 봐. 너네 동조한 그 년놈들도 다 같이 옷 벗겨 줄게.“


현재는 내가 아직도 옛날에 우리가 만날 때처럼 착하고 순진한 여자애라고 생각했나 보다. 네가 변한 만큼, 나도 한 달 사이에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넌 돈만 잃었겠지만 나는 다른 모든 걸 잃었거든. 내가 어디까지 마음먹었는지 내 마음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직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역시 내가 아니라 현재다.그는 아차 싶었는지 바로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 모드로 돌입했다. 자기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감히 그 돈을 욕심 내는 것도 아까운 것도 아니라며 모기처럼 빌었다.

“내가 진짜 아직도 네 사진 보면서 나도 많이 울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고. 내가 자책도 많이 하고 정말 많이 미안해해, 선민아. 너를 위해서 제발 마음 다잡아 줘. 너를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아. 제발.”


이젠 그의 마음을 다 알아서 저 모든 거짓말이 역겨웠다. 니가 내 생각을 하면서 울었다고? 진심 없는 그와 더 연락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입 닥치고 조정날짜에 나와서 마무리나 잘하라고 잘라 버렸다. 그리고 이게 진짜 현재와의 마지막 연락이 되어 버렸다.


몇 달 후 잡힐 조정 기일엔 나 대신 변호사가 출석할 것이니 이제 우리가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은 없다. 그게 서로 원하는 바일 테고.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찌질한 모습이었다. 꽤나 허무했다. 그리고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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