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4
이혼 조정은 짧아야 두세 달 후에나 끝난다고 한다. 나는 현재와의 이혼 절차가 완전히 끝난 후에 상간녀와 합의를 진행하고 싶었다.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니까, 현재도 언제든 마음이 바뀌어서 재산 분할 문제를 운운할 수 있으니 나에겐 쥐고 있을 패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상간녀는 대형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를 선임했다. 난 분명 소송이 아닌 합의를 하자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신변의 보호를 받고 싶어서 돈을 써가며 변호사를 산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변호사는 나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현재도 변호사도 빨리 나와 상간녀의 합의를 끝내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보였다. 내가 너희 불륜 모든 걸 다 덮어주는 대신 합의하는 건데 서류에 싸인을 언제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 내 마음이지.
이렇게까지 서두르려고 하는 이유는 합의서에서 이혼 후에도 만나지 못한다는 조항을 빼버리고 곧바로 둘이 만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마무리가 안되면 내가 언제든 소송이나 군 신고로 본인들을 건드릴 수 있으니 얼른 해결을 봐야 했을 테고.
현재는 상간녀 대신 합의금을 마련했다. 그는 카카오 마이너스 통장을 파서 그 여자애에게 3천만 원을 보냈다가 돌려받았다고 했다. 나에게 계좌 내역을 들킬까 봐 돌려받았다고 한 것이겠지만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언젠가 그 여자에게 전달될 돈이었다. 한심한 놈. 본인이 다 책임지겠다며 퍽이나 멋진 남자친구 노릇을 했을 테지. 책임감 따위는 없는 게. 지금 당장의 불나방 같은 사랑을 위해서 나한테 가진 돈을 다 내주고 또 대출까지 받아서 그 여자앨 도와주다니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나도 현재가 사랑 앞에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안다. 나랑 만날 때 그랬듯이, 지금도 사랑에 빠져서 눈앞에 보이는 게 없는 상태란 것도.
이 모든 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합의금 3천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졌다.
"이혼 후에 너네가 못 만나는 건 당연한 거고, 만나라고 한건 내가 너한테 마지막까지 애정을 준 거지 너네 권리도 내 의무도 아니야. 자꾸 여기에 개입해서 빨리 합의하라고 종용하면 네가 나한테 했던 말들은 다 거짓말로 알게. 미안하다는 그 말조차도. 그리고 합의금 더 받을 거야. 너를 나한테서 가져가는데 걔가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선민아, 행복을 빌어준다는 게 많이 어렵고 힘들다는 거 알겠어. 다시 한번만 생각해 줘. 이렇게 금액을 올리면 니가 행복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헷갈릴 거 같아."
그 행복, 내가 진심으로 바란 거였겠니? 둘이 빈털터리로 행복해 봐 그럼. 한사코 나에게 그 뒤로 그 여자한테 연락한 적도 없다면서 다 끝난 사이라면서. 그럼 합의금이 바뀐다 한들 너와는 무슨 상관일까? 역시 계속 거짓말을 하다 보니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투성이였다. 아, 생각해 보니 그 돈도 그 여자애 대신 니가 추가로 대출받아야 할 테니 허리가 휘겠구나.
곧바로 여자에게도 연락했다.
"합의금 5천만 원으로 변경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하게 약속을 안 지키셨기 때문이고 저를 이혼하게 만드신 거에 대한 책임입니다."
상간녀는 별다른 변명도 없이 죄송하다며 바로 2천을 더 얹어 합의금을 입금했다. 둘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합의금 조달에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조항도 당연히 어겼고.
다음날 그쪽 변호사로부터 서류를 퀵으로 받았고, 곧바로 도장을 찍어 보냈다. 현재에게 약속했듯이 둘의 만남을 금지하는 조항은 삭제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 그와 마지막 연락이길 바라면서 메시지를 남겼다.
"잘 살아. 합의서 작성해서 보냈어. 너랑 3년의 세월도 지울 거야. 죽어서도 만나지 말자. 행복 빌어줄게."
나는 그들이 마치 처음부터 나란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합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고 여행을 다닌다는 걸 알고 있다.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고, 아직 법적으론 나와 현재의 사이가 부부로서 유지되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역시 예상대로 빨리 마음 편히 만나며 놀러 다니고 싶어서 나를 재촉했던 거였다. 부디 너희의 2천만 원짜리 속초 여행이 즐거웠길. 그토록 바라던 대로 만나게 해 줬으니 이젠 행복하겠지.
날 돈에 미친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것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 거고, 사실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