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3
며칠 후, 혼자 서초동의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협의이혼은 2년 내로 언제든 다시 재산 분할을 할 수 있기에 확실히 마무리할 수 있는 조정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결혼 기간도 6개월로 짧았고, 나눌 재산도 없었다. 그저 현재가 나에게 위자료로 준 돈이 전부였다. 그렇게 각자의 지금 갖고 있는 재산을 각자에게 귀속하기로 했다. 혹시나 그가 넣고 싶은 조항이 있을까 봐 현재에게도 물었다.
"각자의 명의대로 재산분할 한다고 넣었어. 내일모레 서명만 하러 서울로 오면 돼. 더 추가할 거 있어?"
"내 조건, 보내준다고 했던 거. 생각해 봤는데 자기한테 돌아가더라도 나한테 선택권이 있는 상태에서 자기한테 가야 진심이지 않을까 해."
그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선택권? 여자 하나 더 생겼다고 지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그리고 그 조건은 나랑의 이혼 서류에 넣을 내용도 아닌데 여전히 그 상간 합의 조건만 생각하고 있다니.
"넌 오늘 이혼 조정 서류 쓰러 가는 내 발걸음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 너는 니 소원, 그 소원 내가 안 들어줄까 봐 내가 어떨지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겠지. 너한테는 지금 나보다 내가 보내준다는 그 합의 내용이 중요하고. 말했던 약속은 지킬 거야 걱정하지 마. 3년을 사랑했었잖아, 과거형이지만. 네가 아는 나 거짓말하는 사람 아니잖아. 적어도 나는 너의 행복은 빌어줄 거야. 그래야 내가 행복할 것 같거든. 근데 지금 넌 마지막까지 나한테 예의 갖추는 모습이 아니야."
조정만 잘 마무리되면 앞으로 둘이 만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은 다 빼버려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여자에게 갈 거라면 내가 보내주는 걸로 끝내는 게 보기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고. 간다는 사람에게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의 한결같이 솔직하지 못하고 기만적인 태도가 나를 더 분노하게 할 뿐이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다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재야 이제 편히 지내. 네가 수정이를 얼마나 진심으로 아끼는지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애틋함이란 단어조차 작다고 느껴질 정도였어. 나와의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수정이한테 잘해주길 바라. 너가 진짜 행복하길 수정이와. 걔와의 합의서에 너희 관계를 구속하는 조항은 없을 거야.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네가 수정이한테 느낀 만큼의 그 무모한 감정, 어떤 사람들은 평생 못 느끼고 죽는 경우도 많대. 소중하게 생각하길 바라. 수정이에게는 나한테처럼 상처 주지 마.“
바로 전화가 왔다. 열 통이 넘게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이렇게 보내준다는 반응에,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겁이 났나 보다.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 그저 어떤 상황이든 어떤 이유든간에 처음처럼 불타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콩깍지가 벗겨지더라도 나는 현재에게 이제 가족이고 변치 않는 울타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쉽게 변할 수도 움직일 수도 있는 거라면 그건 내 자리가 아니었던 거겠지.
"선민아, 끝까지 너의 사랑과 배려가 너무 커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 많이 후회스럽고 내 자신이 한심하고, 하루하루 죄책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나에게 너가, 너에게 내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너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너에게 이런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서, 힘들어하는 너를 모른 척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방황이라고 곧 너에게 돌아간다고 매번을 미안해하며 다짐했는데 결국 이렇게 상처만 남겨서 미안해. 함께했던 3년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든 나를,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용서하지 마. 내 옆에서 밝게 웃던 모습, 그리고 너와의 시간도 네가 보여준 사랑도 영원히 간직할게. 네가 겪은 고통 내가 다 가져갈게. 죽어서도 널 잊지 않을게. 그리고 많이 아파할게.
끝까지 이런 날 사랑해 주고 너의 마음 아프게 하면서까지 날 배려해 줘서 고마워. 그동안 널 생각하면서 다짐했던 것들 못 지켜서 미안해.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너도 행복하길 바라 선민아."
그의 대답이었다.
구구절절 역겨운 사과였다. 뭐 워낙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니까 진심 없이 써내려 간 거겠지만. 내 고통을 상상할 수도 없다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말은 나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혹은 앞으로의 누구에게도 쓸 그의 일차원적인 뻔한 멘트인 것 같고. 그리고 내 고통을 다 가져간다고? 도대체 어떻게? 넌 이 일을 금방 잊겠지만 죽어서도 못 잊는 건 나일 거야.
그는 내가 행복을 빌어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배려라니. 난 마더 테레사가 아니다. 내 말에 내포된 의미는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만나서 행복하라는 것인데 내가 끝까지 자길 너무 사랑해서, 정말 배려해서 보내준다고 착각할 줄이야. 이젠 그에 대한 내 사랑도 남아있지 않다. 제발 조용히 조정 끝날 때까지 재산 분할 번복하지 않고 그 여자한테 꺼지길 바랐다. 진심으로.
며칠이 지나 우리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같이 서류에 서명을 했다. 차 시동이 안 걸렸다며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그는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착잡한 표정으로 이혼 서류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 또한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가."
"응."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서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