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하고 끝난 결혼 16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쓴다. 점점 무덤덤해지고는 있지만 문득문득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울화와 외로움과 미움과 배신감과 자책감. 아마 겨울이 지나가고 날씨가 따뜻해진 탓이리라.
이 지겹도록 마르고 성긴 세상에서 김현재만은 날 이해할 줄 알았다. 방에 누워 불안의 폭풍에 삼켜지도록 눈물밖엔 흘릴 수 없는 나를 함부로 구원하겠다던, 본인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끝없이 자유로워도 된다던. 단단한 척하던 겉모습과 다르게 내면이 나약하디 나약한 그 사람의 말을, 웨하스처럼 만질 때마다 부스러지는 말일지라도, 나는 무턱대고 믿고 싶었었다.
한때의 자기야. 너와 같이 있는 시간은 행복했었다. 나는 항상 과거와 미래에 묶여있는 사람이었고, 나와 달리 넌 오늘에 집중하는 사람이지. 내가 집착하던 과거와 미래들을 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너와 함께 지금을 즐기는 삶이 좋았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순간을 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는 여전히 오늘을 즐기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하루살이처럼 본능에 충실해 쾌락만을 좇는 사람이니. 결국 마지막에 남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똑바로 마주하게 되는 날이 언젠간 오길 바란다. 왜냐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 얻은 행복은 영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선을 안 지키고 자제와 통제가 안 되는 본능을 우선순위로 여기며 살기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에 쌓아놓은 것이 없을 테니까.
난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따라 성당에 다녔지만 불교의 교리를 좋아한다. 많이 죽이면 미치고 많이 도둑질하면 가난해진다는 불교의 말을 좋아한다. 인과응보가 백 프로 있다고 할 순 없어도 언젠간 본인이 저지른 일이 카르마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야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내 옆에 남편으로 있었던 현재는 자기의 행복을 찾아 다른 여자에게로 갔다. 평생 자길 버리지 말라더니 본인이 먼저 내 손을 놓고 도망쳐 버렸다. 어기적리며 손을 털고 뒷걸음질로 떠난 비겁자. 병신. 애초에 삶을 어떻게 제대로 살아가는 건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뭔지 스스로 감정을 지키는 게 뭔지 감도 잡지 못했던 새끼. 열정이 사라져도 상대가 소중하면 그 관계를 지키는 게 사랑이야. 네가 말한 게 사랑이라면 그건 정말 가볍고 보잘것없는 감정일 뿐. 결국 아무리 꾸며 아름답게 말해도, 남들과 한 치 다른 게 없었잖아, 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치 네가 쓰레기가 아닌 것처럼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던 것도, 새롭게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떠날 수밖에 없다는 듯이 합리화하던 것도, 같이 보낸 시간에 대한 싸구려 감상을 남긴 것까지 더할 나위 없이 실망스러워. 네가 나를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아챈 거, 그동안 함께 했던 우리의 시간을 포기한 거 모두 이젠 그나마 빨리 알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비록 우리가 인연까지는 되지 못해도 분명 우리는 무언가였다. 난 그와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다. 딴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늙어서도 아주아주 많이 늙어서도 둘이 손 꼭 붙잡고 의지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였다. 그냥 힘들 때 누구보다 서로를 지키고 같이 견디며 노년에 그때 기억나냐며 우리 힘들지만 서로가 있어 버텼다고 서로에게 감사해하며 사는 걸 기대했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어쩌면 벼락부자가 되는 거보다 그렇게 사는 게 더 힘든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엄마였던가, 누군가가 말해줬다.
“너, 지금 하는 고민과 근심, 고통이 70살 할머니가 됐을 때 생각이나 나겠냐? 지금 그 감정이?“
맞는 말이다. 지금 이 어이없는 결혼과 이혼도 아무것도 아닌 웃기는 해프닝이었다면서 친구들과 웃어넘길 날이 올 것이다. 한때 그런 놈이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갔다고. 어쩌면 기억이 희미해져 생각조차 안 날지도 모르겠다.
조정 기일이 잡히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꽉 채워서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날이 따뜻해졌고, 바람이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계절이 돌아와 버렸다. 밖에는 봄꽃이 핀다. 난 미처 꽃 피우지 못한 결혼생활을 이렇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 시작도 못하고 끝나버린 결혼에서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지금을 온전히 즐길 줄 알게 된 것. 그래서 이젠 오늘의 나에게 집중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가 나에게 남긴 이 감정을 원동력 삼아서 내 삶에 더 매진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매일 노력한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 혼자서도 완전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이전보다 나를 더 믿어주기로 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답은 나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