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허무와 부조리, 사랑스러움

<이방인>, <시지프 신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박창휘

철학에서, 허무주의(虛無主義) 또는 니힐리즘(Nihilism)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혹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측면, 특히 지식, 도덕, 혹은 의미를 거부하는 관점이다. 인간의 가치는 근거없다는 것,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것, 높은 평가를 받는 여타 개념들은 실제로는 무의미하거나 요점이 없다는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허무주의적 입장이 있었다. ㅡ 위키백과, '허무주의', 2025.


현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에 빠지고는 한다. 이것은 허무주의에서 말하는 허무일지도 모른다. '허무주의라고 할만큼 거창하게 부를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빌 허(虛)에 없을 무(無)를 써서 비어있고 없는다. 즉 '모든 것이 비어있기 때문에 아무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라는 간단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쁜 일상생활에 치여 번아웃이 올 때나, 절망적인 상황에 의해서 삶의 가치를 읽어버리거나, 중대한 실패로 인해서 자책하거나, 또는 정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등의 이유로 허무함과 맞닥뜨리곤 한다.─'뭘 위해서 이러고 살고 있을까?', '전부다 부질없는 일이야', '이렇게까지 애쓸만한 가치가 있을까?'─하는 생각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다.

한번 그 늪으로 빠지고 나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유가 뭐가 됐든, 미련을 두지 않기 시작하면 가치는 사라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건지 바보같이 느껴지기 시작할수도 있다.

생각해보자면 그렇다. 공부, 일, 운동같이 건설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과,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돈, 명예와 같이 다양한 보상들이 언젠가, 또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들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루고 나면 성취감을 도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유지하거나, 성과에 따른 도파민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여정을 시작하려고 들때 숨이 턱 막힌다. 행여 이룬 성취가 갑자기 물거품이 된다면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려 들기도 한다.

카뮈.jpg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생전 사진, 교보문고 출처.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는 가장 유명한 소설 <이방인>과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를 통해서, 삶의 부조리와 '살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으로서 이에 저항하는 올바른 태도를 역설한다.


1. <이방인>; 현대인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서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 알베르 카뮈 <이방인>,1942.

<이방인>은 종종 그 충격적인 도입부로 회자되고는 한다. 어머니는 ─전부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한 개인에게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가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거대하다. 주인공은 그런 존재를, 마치 옆집 사람의 조부의 부고 소식 쯤 되는양 서술한다. 게다가 인간성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나?', '어젠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같은 서술이었다면, 일말의 인간다움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담백한 단 한 줄의 서술만으로도, 뫼르소가 얼마나 '현실 감각이 없어보이는' 인간인지 알 수 있다. 뫼르소는 척 보기에도 의도가 좋아보이진 않는 평판 나쁜 이웃 레이몽의 의뢰나,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마리가 결혼하자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수락하는 등, 마치 사람이 실험적으로 게임 캐릭터를 키우듯 한다. 뫼르소의 행보에 삶에 대한 주체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보인다. 이러한 삶에 대한 무관심함, '사람 됨됨이', 언뜻보면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보는 살인에 대한 재판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사람을 죽이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을 기다리며, 죽음을 마주하면서 삶에 선명함을 되찾아간다. 현실감 없이 흘러가기만 하던 인생에서 남은 선택지는 갑자기 없어지고,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면서 뫼르소가 마주하고 음미할 수 있는 것이란 당장 살아있음으로써 즐길 수 있는 것들, 빛, 바람, 소리, 연인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에 대한 동질감과 끝내 부조리해보이는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게 된다.

나는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고 나서 위의 도입부가 담담하다기 보다는, 뭐랄까, 뫼르소의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까지 밖에 느끼지 못하는 '못난 아들'이 보여져야만 하는 모습을 행동한다던지, 혹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발버둥과 같은 복합적인 모습처럼 느껴졌달까. 뫼르소는 무미건조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오히려 사건과 질문에 대해 느낀 바를 순수하게 대답하면서 무의미해 보이는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세상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신(神)에 대한 귀의를 거절할 때 뫼르소의 발버둥은 스스로를 납득하게 할만큼 명쾌한 해답을 찾는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뫼르소가 느끼는 이 느낌, 생각, 감정, 감각, 삶이야말로, (신이라는 추상적인 질서와 신앙심이라는 질서에 대한 순응과 맹목적이고 무저항적인 추종보다도) 그가 그 누구보다 '살아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삶이 감각을 되찾고 소중해질 때, 부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2. <시지프 신화>; '죽지 않기' 위해서 돌을 밀어 올려라.

시시포스.jpg 신들을 우롱한 죄로 영원히 돌을 밀어올려야만 하는 벌을 받게 된 시시포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1942.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공리주의, 테세우스의 배, 트롤리 딜레마 등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논제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어본 바가 있다. 그런데 자살이라니, 자살이 어떻게 철학적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이방인>과 다르게 <시지프 신화>는 카뮈가 가진 인생에 대한 철학을 에세이 형태로 기고한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이방인>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카뮈의 철학이 뚜렷하게 제시된다. 개인적으로 철학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종의 이정표, 혹은 지도나 삶의 지침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카뮈가 진지한 철학적 문제가 하나이며 그것이 자살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에 의미를 둔다. 그것은 돈이 되기도 하고, 명예가 되기도 하며, 가족이 되기도 하고 국가가 되기도 하며, 신(神)이나 정의(正義)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돈, 명예, 가족, 국가, 신, 정의가 모종의 이유로 개인에게 의미가 없어지고는 한다. 투자한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거나, 모함으로 인해 천하의 몹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일가족이 몰락할 수도 있으며, 나라가 멸망할 수도, 신이 창조하신 질서가 무의미해지는 모습을 보거나, 권력의 부패나 힘의 부족으로 정의가 사라지는 순간, 위의 가치들을 믿었던 사람들은 부조리함을 경험한다. 자신들의 잘못은 없음에도, 심지어 한평생 그것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한순간 사라져 버리게 될 수도 있다. 그때에 허리를 굽어 올리면서 하늘을 보거나, 주변을 둘러봐도 세상은 똑같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세상과 우주는 이렇게 속삭이는듯 할것이다. '세상은 원래 이랬다.' 기존의 가치가 산산히 부서진 사람이 추구해야만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제 그는 살아가면서 삶에 의미를 느낄 수 있을까? 신체적으로 죽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간다고 해도, 그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는 부조리를 마주하면, 기준과 가치가 있던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고, 살아있을 이유는 사라진다. 여기서 카뮈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삶이 부조리함에도 살아갈 가치가 '삶' 자체에는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살해야만 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시지프 신화>는 '살아갈 가치가 없더라도 그것이 자살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되려 부조리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세 가지 요소를 설명한다.


1. 반항: 부조리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굴복하지 않는 '반항'

2. 자유: 기준과 가치가 없는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선택하는 '자유'

3. 열정: 반항과 자유로써 당장의 삶의 궤적을 남기는 것에 대한 '열정'


<시지프 신화>는 우리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은 언제든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현실의 부조리함과 이를 극복해내고 살아나가는 올바른 태도와 마음가짐을 이야기해준다.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반항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열정 말이다.

<시지프 신화>는 현학적일 수 있는 그 모든 내용을 명쾌하게 이렇게 마무리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1942.

사족이지만, <시지프 신화>라는 제목에서도 새삼 카뮈의 센스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시포스(시지프)는 필연적으로 죽는 인간으로서 운명에 순응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꾀를 발휘해서 신들을 이용한다. 섭리를 결정하고 운명을 조율하는 절대적 존재인 신들은 자신보다 열등한 처우에 있는 인간의 농간에 놀아난 것인데, 이는 우주와 세상의 부조리함을 이용해서(반항과 자유) 필멸자인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지혜롭게 살아간 것(열정)이다. 시시포스는 비록 영원한 형벌에 갇히게 됐지만, 카뮈는 또한 이 형벌을 형벌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조차 고통스러운 것이 아님을 역설하기도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 모든 곳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EEAAO.jpg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불교의 탱화를 모티브로 한거같다.

얼마전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 '에블린'(왕자경 扮)은 미국에 이주한 화교 1세대로, 소통과 문화의 차이를 경험하면서 아버지를 모시며 악랄하기로 유명한 미국 국세청에게 시달리는 지독한 현실에 시달린다. 그런 와중에 멀티버스 우주를 붕괴시키는 '조부 투파키'(스테파니 수 扮)를 막기 위해서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모든 우주들'의 자기 능력을 하나씩 가져와 싸운다. 격투기, 성악, 간판 돌리기 같이 하나도 연결점이 없는 이 능력들은, 심지어 어떤 수가 있어서 가져온 게 아니라 대부분 가져올 수 있어서 가져온 것들이다. 게다가 이 능력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 모든 우주의 인생을 경험해야 하는데, 원한다면 그곳에서 머물 수도 있다. 다른 우주에서는 성공해서 억만장자가 되거나, 성공한 성악가가 되기도 한 세계선에서 말이다.

에블린은 그런 현실을 살 수 있다는 것에 혹하지만, 온갖 우주를 경험하다가 비로소 자기 우주가 갖고 있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우주로 돌아와 조부 투파키를 막을 뿐 아니라 비관적 허무주의로부터 구해내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자신의 우주로,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내용을 영화평론가인 이동진은 '그 모든 곳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이라고 평론했는데,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어울리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제를 그야말로 꿰뚫는 평론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훌륭한 작품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너무 글이 길어질 거 같아서 핵심만 전달하도록 하겠다.

극중 에블린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생의 여러 가지 선택들이 쌓이면서, 이역만리의 타지에서 세탁방을 운영하면서 생김새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와중에, 딸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못마땅하고, 남편은 똑 부러지게 행동하지 못하며, 아버지까지 모시면서 살아야 한다. 다른 우주에서 온 '웨이먼드'(키호이콴 扮)는 이런 에블린을 보면서 '니가 모든 평행우주 안에서 제일 비참한 에블린이야'라고 그 현실이 부조리함을 못박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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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듣고, 그 사람들과 엮이고 다투지만 사랑하는 우주를 겪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우주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라는 현실을 깨닫는다. 심지어 자신을 몰아세우던 세무조사원이 조부 투파키에게 조종당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해도, '당신은 사랑스럽지 않은게 아니에요! 세상엔 항상 사랑할만한 게 있어요. 손가락이 소시지인 멍청한 세상에서도, 우린 발가락을 아주 잘 다뤄요!' 라며 투파키의 허무주의에 경도된 세무조사원을 설득하고 무력화시킨다.

미운 것도, 귀찮았던 것도, 삶의 일부로서 사랑스럽게 여기면서, 에블린에게 있어 '가장 형편없는 우주'는 '가장 사랑스러운 우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에블린: 잠깐, 기다려. 너 뚱뚱해지고 있어. 그리고 가족 일정 있는데 전화 한 번을 안 하잖아. 공짠데! 넌 니가 뭐 필요할 때만 집에 와. 그리고 너 문신 있지, 그게 가족을 의미하든 뭐든 난 신경 안 써! 내가 문신 싫어하는거 알잖아. 그리고 내가 다른 모든 곳에 있었을 수 있는데, 내가 왜 너랑 같이 있겠니?
그래, 네 말이 맞아. 다 말이 안 되잖아! 아마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저 바깥에는, 우리가 더 작고 하찮은 존재처럼 만들어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 모든 난리통 속에서 네가 날 찾았을 이유 말이야. 그리고 왜든, 뭐가 어째서든,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난 언제든, 언제든,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조이: 그래서 뭐요? 다른 건 다 무시하고 제쳐두게요? 엄마는 뭐든 될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잖아요. 엄마 딸이 이것보다 더한 곳 말예요. 여기서는 이 모든 게 의미 있을 수 있는게 아주 잠깐 밖에 없잖아요.

에블린: 그럼 나는 이 짧은 시간을 아주 소중히 여길거란다.

- 조부 투파키가 투영된 딸 조이와 에블린이 재결합하는 장면에서.

에블린은 무술 배우 스타인 세계도, 성악가로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세계로도 가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자신을 찾고, 동성애자에, 문신까지 한 딸과 똑 부러지지 못하며, 유약하고, 남에게 쓴소리 못하며, 듬직하지 못한 남편과 지지고 볶는 우주를 선택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하고, 분투해야만 하는 그 우주를 말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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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찾아오는 허무함이란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현실에 자책하고, 시도 끝에 실패로 끝나고, 말해봤자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찾아오는 그 감정, 끝을 모를 현실의 장벽과 막연함에 좌절하는 그 감정. 이것은 우리가 더 잘하고 싶었고, 더 만족할수있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욕망의 발현이다. 그리고 이게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에 생기는 정동(Affect)이라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세상의 부조리함과 가치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마치 부모에게 말을 안하며 떼를 쓰는 아이의 행동, '가치의 집중을 바라는 수동적 저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면 어떨까? 모친의 죽음도, 애인과의 결혼도 아무래도 좋았을 뫼르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이자 삶의 종점인 사형을 선고 받고 나서야 어머니의 감정을 이해하고, 애인을 그리워 했듯이 말이다.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 위로 밀어올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누려야만 하고, 신봉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제멋대로에 기분파에다가 겉잡을 수 없는 불규칙한 세상의 섭리에 '반항하고, 자유를 추구하며, 열정을 가지며'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지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사랑스러워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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