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 회사 점심 메뉴는 뭘까? 호기심에 찾아보니 짜장면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짜장면이 먹고 싶었는데 행운이군' 설레는 마음을 안고 회사 식당에서 짜장면을 후루룩 쩝쩝 먹고 있다.
그런데 옷에 짜장면 국물이 튀는 참사가 발생했다. 하필 그날 흰 옷을 입고 왔는데 국물이 튄 것이다. 오늘 오후에 상무님 방에서 보고드릴 것도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국물 튈 일 없는 볶음밥을 먹을걸..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심하게 튄 것은 아니지만 계속 신경이 쓰인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서 비누를 묻혀 싹싹 지웠다. 그런대로 지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색은 남아있다.
'상무님 눈에 안 띄어야 할 텐데.. 신경 쓰이네'
다행히 보고 때 아무도 내 옷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쓸데없이 걱정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람 시선을 늘 의식하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남들이 해외여행을 가면 나도 가고, 남들이 외제차를 타면 자기도 타는 사람이 나는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하다고 말하고 다닌다.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이다.
토머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는 한 사람에게 미국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공원 벤치에 앉게 했다. 그 옆에는 실험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섯 명의 다른 피험자들이 있었다.
노홍철 같은 사람이 입을 쩍 벌리고 웃는 모습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그 사람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길로비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나 여섯 명에게 물어본 결과, 불과 한 명만이 그 티셔츠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다섯 명은 티셔츠 그림은커녕 그런 사람이 앉아 있었는지 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반복해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사자만 예민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은 사회적인 평판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좋건 싫건 간에 업무 실적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된다. 이 평가는 객관적으로 진행된다고 하지만, 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이미지에 따라 평가가 상당 부분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절하고 붙임성 있고 젠틀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한다.
직장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류층에 속하고 싶어 한다. 무리를 해서라도 강남에서 살고 싶고, 차는 고급차를 몰아야 하며 적금을 깨서라도 명품을 구입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한다. 소셜 미디어에 여행 사진을 깨알같이 올려주는 것은 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현상이 특히 심하다. 20대 때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 되는 것이 최고의 테크트리이다. 30대 때는 경제력과 외모를 다 갖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야 하고 서울 노른자 땅에 자기 집도 갖고 있어야 한다. 자녀들은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사립초등학교로 진학시켜 일찌감치 일류대 진학을 대비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은 공식이 확립되어 있다.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회에서 낙오자로 인식된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공식은 신화가 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슬픈 우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의식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걸 원한다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표현은 사람들 시선을 건강하게 의식하는 방법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좋든 싫든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상호작용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에티켓이라는 것이 있기에 늘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의식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창업했지만,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Next와 픽사를 설립하며 재기를 노릴 때도, IT 업계 사람들은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늘 청바지를 입고 다니며 화가 나면 빽빽 소리치는 그를 사회성 떨어지는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아이폰을 발명하며 큰 성공을 거두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청바지를 즐겨 입고 콜라와 햄버거로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을 소탈한 모습이라고 칭송하기 바빴다. 해석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세상의 시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잡스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했기에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뚜렷하면 세상의 가치관이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이솝 우화에는 다음 이야기가 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시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 나귀에 짐을 잔뜩 싣고 길을 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화를 냈다.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나귀에게 저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다니".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나귀의 짐을 자기가 지고 길을 걸어갔다.
사람들은 아들을 욕했다. "늙은 아버지에게 짐을 지게 하고 아들은 편하게 길을 가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짐을 지고 가게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욕을 먹었다. "어린 아들에게 짐을 지우고 아버지는 편하게 길을 가네?" 결국 아버지는 나귀를 안고, 아들은 짐을 들고 길을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세상에 나귀를 안고 가는 멍청한 사람이 있다니!" 그들은 결국 그렇게 다리를 건너던 중,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모두 다 강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사정도 모르고 툭툭 던지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내 주관과 소신을 갖고 살아가자.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참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 사람에게는 내가 불편하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자. 악의 없이 정말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일 수 있지만, 내 인생을 사는 주인공은 바로 나이고, 결정도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을 하자. "저를 생각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마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꼭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흔쾌히 내 말을 듣고 물러설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된다. '난 주변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아' 이 생각으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시끄럽게 전화 통화하고, 줄 안 서고 새치기하며 교통법규를 밥 먹듯이 위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무례한 사람일 뿐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다. 건강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다.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목표가 뚜렷하고 내 소신을 갖고 있다면 타인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내가 주변에 혹시 피해를 주는 것은 없는지 조심하는 모습도 갖게 된다.
결국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조언을 해줄 수는 있지만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이를 명심하고 주변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자. 그리고 몇 살에는 무엇을 해야 성공한 인생 이런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