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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필도 갱생된다

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글씨'

by Goldlee

흰 종이 위에 쓴 글씨들이 빽빽하게 흑심의 연필로 가득하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진 않지만 왜 썼을까는 궁금해서 기억을 떠 올릴까 싶어 읽어 보려고 한다. 비 오는 새벽의 흐릿한 하늘처럼 흰 종이 위에 쓰인 글씨가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힘을 주고 읽다 보면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글자에 읽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글씨는 인생의 흔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씨.


키보드를 치면 나는 소리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 신이 난다. 오타가 나기 전까지 흐름이 끊기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흰 종이 위에 검은색의 연필로 쓸 때가 가장 좋다. 만년필이 좋다고 해서 써 보기도 했지만 아직은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연필이 더 좋다. 연필은 지울 수가 있어서 좋다. 키보드 역시 오타가 나면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지우개로 지우며 쓰는 글씨는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서 좋다. 틀린 글자, 못생긴 단어, 맘에 안 드는 글씨. 삐뚤빼뚤한 문장. 작아진 어미. 선을 넘는 조사. 쓰고 있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우며 다시 쓰게 한다. 그래서 연필로 쓰는 글씨는 나를 고쳐준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건가 보다.


올 1월의 추운 날이었다.

집에 가서 해 먹기 귀찮아 음식을 포장하기 위해 들른 국밥집. 대학 신입생 때 친하게 지냈지만 군을 제대하고 졸업을 하면서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술 안 취했다고. 쫌! 제발 가만히 놔두라고."라고 소리치는 친구를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앉았다가 포장음식이 다 되어 검은 봉지를 들고 들리지도 않을 친구에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여닫이 문 사이로 보이는 가게 안으로 걱정을 밀어 넣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술 취한 친구를 찾으며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못 마신다며 입에 대지도 않던 대학 신입생환영회 때가 생각났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선배가 시켜서 비틀거리는 내 뒤를 안절부절못하며 따라가며 집으로 보냈다고 했었던 그 친구. 내가 집에 가는 버스를 제대로 타는 걸 본 후에야 자기 집으로 향했던 친구. 다음날 알려준 친구의 말에 같이 점심을 먹는 사이가 된 친구였다. 얼마 만에 본 건지 세어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도 못했지만 걱정은 벌써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친구를 찾았다. 비틀거리며 걸으며 담배를 물고 깨끗하지도 않을 공기를 한 껏 넣었다가 가진 거라곤 숨 밖에 없으면서 다 내 보내려는 듯 크게 연기를 내뿜고 걷고 있었다. 뒤따라 갔다. 불러 세워 집이 어디냐고 타라고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고개 한번 돌리더니 못 들은 체한다. 차가 들어가지 못할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는 뒷모습에 집이 근처이길 바라며 옛 친구의 비틀거리는 걸음에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글씨가 비틀거리며 쓰인 나를 보는 듯했다. 틀리지 않았다고 우기며 진하디 진한 볼펜으로 빠르게 빼곡히 날리며 써 온 내 뒷모습을 보는 듯했다.


나는 악필이었다. 오래전 그날 나를 끝까지 돌봐준 친구를 나는 버렸다. 버리면서 스스로 위로하며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글씨가 흩날리고 밑줄 쳐진 선을 넘는 악필을 못 본 척 마침표를 찍었다. 비틀거리며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 뒷모습은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글씨의 흔적인 것이다. 뒤늦게나마 따라가 본다. 이렇게 글씨를 지우고 너를 붙잡아 너를 데려다주고 온다. 날카로워진 글씨가 점점 뭉툭해진다. 날카롭던 글씨가 하늘을 찌르듯 내 숨조차 찌르고 있었다. 그때는 하지 못해 날카로워진 내 글씨는 점점 뭉툭해지고 있다. 지우개로 지우고 연하지만 꾹꾹 눌러쓰고 다음 글자를 쓰기 위해 지금 쓰고 있는 글자를 날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시 뒤따라 가는 것이다. 악필이었지만 악인은 아니고 싶어서 보내주고 왔다.


악필은 교정하고 사람은 갱생한다. 매일 책을 베껴쓰기를 하며 나를 갱생했다. 삐뚤어진 글씨와 들쭉날쭉 크기조차 다른 글씨를 지우고 다시 썼다. '를'이라는 조사를 쓸 때마다 선을 넘어버리게 되는 게 아직도 잘 고쳐지지 않지만 쓸 때부터 신경을 쓰는 모습이 교정되어 가는 듯하다. 모난 'ㅁ'을 스스로 깎고 깎으며 '사람'을 '사랑'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사람'이 합쳐져 '삶'이 되는 것 같은 태도가 바뀌고 있다. 그래서 글씨가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ㅈ'을 쓰는 단어들을 보면 '자주, 저주, 저급, 저질'같이 좋지 않은 내용을 표현한 글자가 있다. 다른 글자 중에서는 '정, 좋다, 자랑, 자신, 자녀'처럼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단어도 있다. 이처럼 글씨는 나를 바꾼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다르다. 그래서 악필은 교정을 해야 하고 사람도 노력하면 갱생할 수 있는 것이다. 글씨가 사람을 갱생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 지인의 전원주택에 초대되어 갔다 왔다. 남의 말을 하길 좋은 하는 사람들. 밤새 없는 사람의 흉을 보고 흠을 잡아내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애매하게 자리 잡은 'ㅇ'처럼 나도 함께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섞여 있었다. 내 글씨의 'ㅇ'은 어쩔 땐 크고 어쩔 땐 작고 크기가 일관성이 없다. 나도 이들을 볼 때마다 일관성이 없었다. 누가 말하면 그렇게 또 다른 이가 말하면 그렇게 따라갔다. 그래서 보지 않았는데 악필을 어느 정도 교정하고 나서 다시 이들과 마주하고 보니 내 귀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날카로웠던 내 심장박동의 그래프는 나를 살아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면 지금은 깎이고 깎여 곡선의 부드러운 산등성이를 걷듯 글씨가 물 흐르듯 쓰이고 있음에 스스로 감탄하게 된다. 글씨가 나를 바꾸고 내가 글씨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가시 돋친 말에서 흩날렸지만 이제는 마침표까지 곧게 뻗어 나가고 있다. 계속해서 가게 된다. 나의 글씨는 이렇게 갱생 중이다.

산 안에 소리를 들어보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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