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지우개'
아이들은 지우개가 필요 없다. 지워야 할 게 없기 때문이다.
어른에게만 지울 것이 필요하다. 고쳐야 할 것, 틀린 것들 그리고 잊어야 할 것들을 지워야 한다. 그런데 지워지지 않는 것도 있다. 빡빡 문질러봐도 탄 냄비는 되돌릴 수 없다.
화요일 오전.
매주 화요일 아침은 부담스럽게 바쁘다. 그런데 즐겁게 바빠서 기분이 좋다. 지난 일주일 동안 써 둔 조각 글을 붙이고 고쳐 쓰다가 지운다. 잠깐잠깐의 생각들의 조합을 이어 붙이질 못해 다 버린다. 비우려고 달리기도 한다. 달리고 나면 텅 빈 내 머릿속이 보인다. 이제 다시 쓴다.
수요일 밤.
두 딸 중 더 어린 딸인 이우의 스마트폰을 뺏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그럼 필통정리 해야지."
필통 정리하고 남은 지우개가 서너 개가 된다. 아빠에게 선물로 준다고 한다. 나중에 쓸 일이 있다고 보관해 두라고 했다.
"지우개가 필요 없는데."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래. 아이는 지울 게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목요일 오전.
샤워하고 난 뒤 거울을 본다. 거울에 김이 서렸다. 오늘은 얼굴을 보기 위해 손바닥으로 쓰윽 지웠다. 낯선 얼굴이 나타났지만 놀래지는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고 가면을 썼다. 그리고 밖으로 나선다. 글쓰기 수업이 새로 시작되었다.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누구를 소개한 걸까?
금요일 저녁.
약속한 사람이 약속을 취소한다. 할 일이 사라진 나는 갈 곳을 찾는다. 비가 내려 도로 위 하얀 선을 지웠다. 아무렇게 가도 용서해 줄거라 착각한다. 어쩌라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내 맘대로 가고 싶을 뿐인데. 어쩌라고! 선명한 신호등의 빨간불빛에 멈춰 선다.
토요일 새벽.
앞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다. 늦은 건 아니지만 비가 그치질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참석이라고 적어 둔 내 이름을 지운다. 아쉬움의 외침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축구하러 갔다. 상대팀에 5년쯤 전에 같이 운동한 동생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나도 하지 않는다. 애써 모르는 척하는 표정이 흥미롭다. 그냥 목례 한 번이면 될 것을 계속 모른 체한다.
지우고 싶었던 걸까? 그때 그 시간들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나 보다. 이렇게 다시 새기고 있으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월요일 오후.
루쉰의 [쿵이지]에서 주인이 이런 말을 한다.
"쿵이지가 아직 외상이 열아홉 푼이 남았는데!"라고 몇 년 동안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었을 거라는 추측을 한다.
오전 내내 '루쉰'를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나도 어딘가의 누구에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화요일 새벽.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고 몇 번을 해도 머릿속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의 생각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하기로 한다. 그리고 잊어먹었다. 그래서 또다시 쓴다. 지우지 말자. 지우지 않아도 지워질 것은 지워진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건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