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이제 취미로 좋아할게!
스물다섯부터 서른여덟까지 책 만드는 사람이었다.
1년에 10권 이상의 책을 만들 때도 있었지만(이런 출판사는 너무 악덕이었지), 대체로 1년에 5~6권 정도(이렇다고 해도 악덕한 곳은 악덕하고) 꾸준히 책을 만들었다. 13년을 넘게 '북에디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았다. 출판사 입사 초기에는 스마트폰도 없었을 때였지. 필름 얼룩 긁어내고 호랑이가 담배피며 교정보던 시절. 세상은 정말 빠르게 바뀐다. 특히 책이 기획되어 유통되는 그 한가운데 서 있으면 세상은 더욱 빠르게 움직인다.
출판계에 처음 발을 디딘 스물다섯부터 떠나게 된 서른여덟까지 내가 세상에 내놓은 책은 과연 몇 권쯤일까? 한 번 적어나 볼까 하다가 고개를 세차게 휘이 젓는다.
"아, 부질 없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판권에 내 이름이 적힌 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책임편집했던 책들을 모두 블로그에 쌓아두면서 관리(?)했다. 독자들의 리뷰를 스크랩해두고 두고 두고 읽으며 기뻐했더랬지(내가 쓴 책도 아닌데!).
열정, 열혈, 열심, 뭐 이런 단어들이 나를 수식하곤 했는데, 그랬던 내가! 어쩌다 책 만드는 일을 때려치우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스토리를 보자면 '번아웃' 때문에 바닥을 내리 찍었다거나 '인생의 쉼표' 운운하며 제주라도 떠나야 하는 건데...
나는.
좀 더 액티브한 일이 하고 싶었다(출판도 넘 액티브하긴 하지만!).
출판이 지긋지긋해서, 책이 너무 싫어져서, 저자들에게 질려서 그만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출판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한다. 막 제본된 책의 종이 비린내, 인쇄소 공기, 초고 속의 널부러진 글들, 텍스트에 힘을 실어주는 디자인, 책에 쏟아낸 저자들의 인생,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게 없다.
그럼에도 2019년 여름 무렵부터 스멀스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할 만큼 했다.
그렇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했고, 나름 잘했다(기분탓이 아니라 진짜다). 총 세 군데의 출판사에서 일했지만 어떤 곳에서든 팀 매출이 아래를 향한 적이 없다. 지난해보다 올해 매출이 언제나 높았다(물론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각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된다, 껄껄껄). 마지막으로 일했던 출판사를 떠나며, 내가 이곳에 8년 넘게 일하며 찍은(인쇄부수를 말함, 판매부수 아님 주의) 책들이 총 50만 부 가까이 된다는 걸 깨닫고(이럴 거면 출판사를 차렸어야 했네 싶었지만) 더욱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더 사랑했었어.
출판과 진하게 사랑했고 이별했다. 내가 더 사랑한 쪽이다. 비록 책은 나에게 돈과 명예를 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간 내가 쏟아부은 사랑에 만족한다. 그래서 미련이 없다.
스타트업으로 넘어온 지 1개월 남짓.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묻는다.
"출판계 떠난 거 아쉽지 않아?"
그럼 나는 촉촉하고 아련한 눈을 하고서 답한다.
"내가 더 사랑했어. 미련없어. 괜찮아."
+ 에디터H님과의 만남
학부모 대상 설문조사가 필요해서 인스타그램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은혜로운 인친들이 DM을 보내왔다. 그중 한 분은 G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에디터.
언젠가 에디터H님이 만든 책의 저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저자가 본인 담당 에디터 칭찬을 엄청 하는 게 아닌가. 나도 에디터였기에 참 궁금했다. 도대체 H는 어떤 분일까(속마음 : 왜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도움을 주겠노라 먼저 손을 내밀어주어 참 고마웠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H님이 내게 말했다.
"책 정말 잘 만드시던 분이었는데, 새로운 일 하신다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에이~ 뭘요. 전 미련 없는 걸요."
내심 기분 좋았으나 쿨한 척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하길.
"이제 봄쌀님이 만든 책을 못 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거 참 아쉬운데요."
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듣고 나니 무척 아쉽다. 에디터였던 내가 아쉽다.
구질구질하게 옛사랑을 스토킹하며 온라인서점 사이트를 겉도는 나를 종종 목격한다. 내가 만든 책 판매순위를 체크하고, 이벤트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책 제목 해시태그 따라 '좋아요'를 누르고 다니는 이 미련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자꾸 옛놈들이 잘 사는지 궁금하다. (헙헙;;)
이제 진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자. 참 행복했다 옛사랑 추억하면서.
* 봄쌀, 2006년 7월 3일부터 2019년 10월 25일까지 에디터로 일했음